[책마을] 경성엔 '시대착오' 여성들이 살았다

입력 2024-05-10 18:53   수정 2024-05-11 01:23

지난해 국립현대무용단의 공연 ‘여자야 여자야’를 보다가 문득 혼자 울었다. 무대 위 스크린에 나혜석, 김명순, 지하련, 강경애, 주세죽 등의 이름이 하나씩 떠오르며 마치 초혼처럼 공연자가 이들을 호명하던 순간이었다. 일제강점기 신식 교육을 받고 양장을 멋스럽게 입은 ‘모던걸’ 이미지로 곧잘 상상되는 여성들이지만, 자기 삶의 조건 속에서 구태의 가부장적 관습과 치열하게 싸웠고 적지 않은 인원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이름을 곱씹으며 이들의 저항과 오늘 사이의 연결에 관해 생각했다.

제1호 하와이 출생 한국인이자 박헌영, 김단야 등과 독립운동, 재미한인 진보운동에 헌신한 현앨리스. 100년을 앞서간 코스모폴리탄이자 코뮤니스트인 그녀가 경성에서 서양식 카페를 운영한 시간을 복원해낸 장편소설 <카카듀>. 현앨리스는 내게 줄곧 궁금한 사람이었고 <체공녀 강주룡>의 저자 박서련이 그녀를 소설로 다뤘다고 했을 때 나는 환호했다. 거침없이 예약판매로 주문을 걸어두고선 책이 배달 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랬기 때문에 소설 초반 책장을 넘기면서 당황하기도 했다. 첫째로는 이야기 대부분이 영화인 이경손을 화자로 삼아 진행된다는 점이었고, 둘째로는 이 때문에 현앨리스의 삶과 행적이 다소 알쏭달쏭하게 그려진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두 가지가 이 작품의 매력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예술을 향한 순수한 이경손의 열망이 끝내 현앨리스와 겪은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어떻게 극화되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잔잔하게 전해지는 감동이 있었다. 더불어 현앨리스를 대단한 여성 영웅으로 묘사하기보다는 풍파에 치이지만 유머를 잃지 않고 조금씩 성장해가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점에서 여운이 남았다.

“마침내 앨리스에게 아버지나 어머니보다 사랑하는 것이 생겼다. 그것은 인물도 사물도 아닌 사상이었다.” (260쪽)

진창 같은 식민지의 여성이 지배와 폭력, 굶주림 없는 모두가 평등한 세계를 꿈꿨다. 이런 ‘이상’은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인지. 그것은 눈앞에 실현될 조금의 기약도 없이 깜박거리지만, 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100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이 바보 같은 시대 착오자들이 무수히 실패하며 걸어간 발자국 위로 시대를 움직이는 변화의 길이 나 있었으리라고,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최지인 문학 편집자·래빗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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