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커피 400잔

입력 2024-05-15 18:20   수정 2024-05-16 00:04

한국인의 커피 사랑은 유별나다. 작년 한 해 동안 1인당 400여 잔을 마셨다고 한다. 세계 평균은 1인당 100잔이고, 최대 소비국인 미국이 매년 300잔 정도라고 하니 이쯤 되면 커피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음료라고 할 만하다.

언젠가 미국인 친구에게 너희가 그렇게 즐겨 마시는 커피 명이 왜 아메리칸이 아니고 아메리카노냐고 물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 주둔 미군들이 쓰디쓴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서 마신 것이 아메리카노의 기원이라는 걸 확인하고자 물었던 것인데, 답변은 예상과 달랐다.

미국 독립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차를 멀리하게 된 미국인들이 커피를 차처럼 마시느라고 묽게 만든 게 아메리카노의 기원이라는 답이었다. 그러면 왜 아메리칸이 아니고? 아메리카노가 더 멋있어 보이니까. 밀크커피 대신 카페라테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가 되겠다. 정답을 알 수는 없으나 보스턴 차 사건 이후에 묽은 커피가 등장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에 커피는 애국의 상징이자 혁명 음료로 간주됐다고 한다.

바그다드, 이스탄불 등 이슬람 문명권에 커피하우스가 문을 연 시기는 16세기 중반쯤으로 추정된다. 100년쯤 후에는 영국 최초로 옥스퍼드에도 커피숍이 등장한다. 커피하우스는 술 없는 선술집이었고 카페인은 사람들을 토론의 장으로 몰아갔다. 이후 유럽 전역엔 커피하우스가 퍼지게 됐고, 프랑스혁명의 진원지는 카페라는 이론도 꽤나 설득력이 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다방에서 커피 판매가 금지된 적이 있었다. 먹을 쌀도 없는데 왜 커피에 돈을 쓰느냐는 게 이유였지만, 커피가 생산해내는 여론도 무서웠을 것이다. 다방 하면 떠오르는 어두운 조명과 어항(魚缸)으로 분리된 좌석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여실히 보여줬는데, 1980년대 말까지 대학가 카페는 어두운 조명의 지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5월 중순, 더운 계절이 왔다. 동네 커피숍의 자리다툼이 더 치열해지는 시간이다. 커피숍에 오는 젊은 층의 60% 이상이 카페에서 공부하는 ‘카공족’이라는 보도가 있었고, 신문 들고 찾아오는 시니어와 커피숍 점원 간의 갈등도 종종 뉴스거리가 된다. 편하게 이야기하고 책 볼 수 있는 공간, 이웃과 대화 나누고 음료 마실 수 있는 곳, 선진 도시들에서 공공도서관이나 문화센터가 제공하는 작은 편리함이다. 땅값 비싼 미국 맨해튼에도 도보권에 어김없이 그런 공간들이 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4만달러를 바라보는 우리나라에 공공이 제공하는 편의시설이 너무나 귀하다. 한국인이 커피가 좋아서 그렇게도 커피를 마셔대는지, 1년 400잔 중에 커피가 진짜로 맛있어서 마시는 건 몇 잔이나 되는지 생각해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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