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재일교포의 처절한 삶, 사랑으로 이겨내다

입력 2024-05-20 10:00   수정 2024-05-20 15:46


일본을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를 식민 지배한 일본은 역사를 왜곡하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등 갖가지 사안으로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나라다. 그런가 하면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여행지이기도 하다. K팝과 K드라마에 심취한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을 많이 찾는 것도 근래의 새로운 풍경이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많은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끌려갔다. 1945년 일본이 우리 땅에서 떠났지만, 공산 정권이 들어선 북한이나 혼란을 겪다가 전쟁이 터진 남한으로 돌아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파친코>는 1910년부터 1989년까지 4대에 걸친 재일 한국인의 삶을 담은 소설이다.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소설에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 겪은 고난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민진 작가는 7세 때 미국으로 이민 가서 예일대 역사학과와 조지타운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기업 변호사로 일했다. B형간염으로 건강이 나빠지면서 변호사를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첫 장편소설 <백만장자들을 위한 공짜 음식>이 11개국 언어로 번역되고 여러 상을 받았다.
세계적 화제작으로 떠오르다
두 번째 장편소설 <파친코>는 대학교 3학년 때인 1989년에 구상해 쓰고 고치기를 거듭했다. 2007년 일본계 미국인 남편이 도쿄로 발령 나 일본에서 지내며 조선계 일본인 수십 명을 인터뷰한 뒤 다시 썼다. 2017년에 <파친코>가 출간되자 75개 이상의 주요 해외 매체가 ‘올해의 책’에 이름을 올리면서 세계적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2022년 애플TV에서 드라마로 만들어 또다시 화제가 되었다.

4대에 걸친 삶의 여정을 담은 만큼 <파친코> 1, 2권을 합치면 700페이지가 넘지만 한번 책장을 넘기면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파친코>의 중심인물 선자는 부산 영도에서 부모가 운영하는 하숙집 일을 돕다가 하숙생 백이삭과 함께 일본 이카이노로 향한다. 조선인이 많이 사는 빈민가 이카이노는 이삭의 형 요셉과 부인 경희가 사는 곳이다.

한국장로교회의 목사로 일하던 이삭이 구속된 이후 선자는 아들 노아와 모자수를 키우며 온갖 고생을 한다. 몇 년 만에 석방된 이삭이 죽자 자녀가 없는 요셉과 경희가 조카들을 잘 돌봐준다. 가정 경제를 책임졌던 요셉이 심한 화상을 입은 후 가세는 점점 기울어간다. 선자의 어머니 양진이 일본으로 오게 되고, 양진이 집안을 보살피는 가운데 선자와 경희가 열심히 일해 근근이 가족들이 삶을 영위한다.

공부를 잘하는 노아는 와세다대학에 들어가지만, 출생의 비밀에 충격받아 가족과 인연을 끊는다. 공부에 흥미가 없던 모자수는 파친코에서 열심히 일해 인정받고, 떠돌던 노아도 파친코에서 일하게 된다. 파친코는 일본에서 밑바닥 일밖에 할 수 없는 재일교포가 돈과 권력과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남한 여권을 갖고 사는 사람들
파친코 업체를 인수해 크게 성공한 모자수는 아들 솔로몬만큼은 자신과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며 어릴 때부터 영어 공부를 시킨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 진학한 솔로몬은 훌륭하게 성장해 일본 금융회사에 취직하지만 계략에 빠져 해고되고, 결국 아버지처럼 파친코에서 일하기로 결심한다.

4대에 걸친 장구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가족 6명이 세상을 떠난다. 각각의 사연을 안고 있는 그들의 생을 통해 재일교포의 아픈 삶을 하나하나 짚어볼 수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에 능통한 모자수에게는 일본 귀화라는 길이 있었고, 미국 유학까지 마친 솔로몬은 미국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남한 여권을 갖고 사는 사람들’로 남았다. 특별한 각오나 선조들의 당부 때문이 아닌, 부당한 일을 수없이 자행한 일본에 합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친코>를 읽으면 고생하는 조선인보다 변하지 않는 일본인이 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4대에 걸쳐 단단히 뿌리내려도 조선인이라는 굴레로 끝내 차별하는 일본의 아집이 지금도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흡인력이 대단한 <파친코>는 이민자의 삶을 훌륭하게 조명한 소설이자 20세기 한국과 일본을 정확하게 조망하며 분석한 기록이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이민자의 삶이 고되다는 것과 그 힘든 고지를 넘을 방법은 가족의 사랑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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