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너 때문에 정말 미치겠어. 언제까지 이렇게 결혼 안 하고 엄마 속만 썩일래?”
또다시 시작된 엄마의 결혼 독촉. “네 나이가 지금 몇이야. 어휴, 저거 얼굴에 주름 좀 봐. 어떡해. 너 지금보다 더 나이 들면 진짜 후회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딸은 조용히 일어나 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향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대화는 여기서 끝났을 겁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습니다. 딸을 좇아 계단을 뛰어 올라온 엄마는 기어코 한마디를 더 했습니다. “선 자리도 안 나가고. 언제까지 이렇게 멍청이처럼 굴 거야? 그림은 무슨 그림! 네 그림은 그냥 아마추어 수준이야. 헛꿈 꾸지 마!”
딸은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쾅 닫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엄마의 가시 돋친 말보다 더 속상했던 건, 그 말속에 사실이 섞여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딸의 나이도 어느덧 30대 중반. 유명 화가가 되겠다는 꿈은 아직도 멀기만 해 보였습니다. 결혼이 마냥 싫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도 마음이 가는 사람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남자, 에두아르 마네는 유부남이었으니까요.
훗날 위대한 화가이자 인상주의자의 핵심으로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베르트 모리조(1841~1895)에게도 이런 우울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모리조의 삶과 사랑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모리조에게는 두 살 많은 언니(에드마 모리조)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죽이 척척 맞았습니다. 그림을 아주 좋아한다는 점도 같았습니다. 어느 날 자매는 부모님에게 말했습니다. “그림을 배우고 싶어요. 우리는 화가가 될 거예요!” 부모님은 웃으며 자매를 미술 교실에 보내 줬습니다. 그림은 당시 상류층 여성이 갖출 만한 훌륭한 교양이자 권장할 만한 취미였으니까요.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그림은 ‘취미’가 될 수 없었습니다. 재료를 준비하는 게 너무 비싸고 어려웠거든요. 여러 재료를 직접 갈아서 섞은 물감을 주머니에 보관했다가 캔버스에 바르려면 전문적인 지식과 장비를 갖춰야 했고, 그러려면 작업실도 필요했습니다. 여기엔 지금 가치로 연간 최소 1000만~2000만원(2000~3000프랑)이 들었지요. 하지만 19세기 중반 튜브 물감이 발명되고 종이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누구나 연간 50만원 정도만 쓰면 어디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취미 화가’들이 생겨났고, 그중에서는 여성도 많았습니다.
모리조 자매는 열정과 재능이 넘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라파엘로와 루벤스 등 위대한 화가들의 걸작을 베껴 그리면서 둘의 실력은 일취월장했습니다. 자매가 20대 초반이었던 1864년 당대 최고 권위의 전시회인 살롱에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게 이들의 실력을 증명합니다. “우리 딸들은 뭐든지 잘해!” 부모님은 이런 성과에 흐뭇해했습니다.
하지만 자매가 진지하게 ‘전문 화가’를 꿈꾼다는 걸 알았다면 부모님의 생각은 아마 달라졌을 겁니다. 자매의 선생님은 편지로 부모님에게 경고했습니다. “따님들의 실력과 열정은 대단해요.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 화가가 될 수 있을 만큼. 그런데, 꼭 그게 좋은 의미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선생님들 같은 상류층 세계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급진적인 일이에요. 심지어 재앙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하지만 모리조 자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위대한 화가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당시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여성은 최고 권위의 미술 학교인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없고, 루브르 박물관에도 여성의 그림은 한 점도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역사에 위대한 화가로 남은 여성이 없으니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천재성은 남성만 가질 수 있다는 게 그 시절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 자매가 자신들의 꿈을 드러내놓고 밝히지 않은 채 꾸준히 그림만 그렸던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던 자매의 인생에 1868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모리조가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모리조 가족과 마네 가족이 사교계에서 인연을 맺으면서였습니다. 마네 가족에는 훗날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서른여섯살의 에두아르 마네가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미술계의 문제아이자 젊은 예술가들의 스타였습니다. 참신하고 파격적인 작품, 멋스러운 패션 감각과 매력으로 이름 높은 인물이었지요.
모리조는 마네를 보자마자 그가 미술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길 천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아이돌에 대한 사랑과도 비슷한, 동경과 인간적인 호감이 뒤섞인 강렬한 감정이 모리조의 마음속에 싹텄습니다. ‘저런 사람이라면 결혼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모리조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마네는 애 딸린 유부남이었으니까요.
마네도 아름답고 재능 있는 모리조에게 호감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는 가끔 미묘한 기류가 흘렀습니다. 두 사람이 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썸 타는’ 관계였다는 게 대부분 미술사가의 얘깁니다. 그래도 어쨌든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관계로 남았습니다. 비록 모리조가 마네의 칭찬과 비판에 일희일비하고, 다른 여성 제자를 슬쩍 질투하기도 하고, 마네가 엄청난 공을 들여 모리조를 그리기도 했지만요.
그렇게 마네와의 사제 관계에 온 정신을 쏟았기에, 모리조는 언니의 변화를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나 결혼해.” 어느 날 갑자기 들려온 언니의 말에 모리조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습니다. 언니의 결혼 상대는 마네에게 소개받은 해군 장교. “예술가의 길을 걸을 자신이 없어. 같은 길을 걷진 못해도 항상 응원할게.” 위대한 여성 화가의 꿈을 함께 꾸는 동지였고 가장 친한 친구였던 언니는, 이렇게 갑자기 곁을 떠났습니다.
영원한 이별은 아니었습니다. 자매는 그 후로도 평생에 걸쳐 사이좋게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외로움과 불안감이 치밀어 오르는 날이면 모리조는 언니에게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모두가 나를 버리는 것 같아. 나 혼자 외롭게 늙어버린 것 같아.” 언니는 모리조를 진심으로 위로했습니다. “나는 네가 부러워. 결혼 생활이란 게 생각과는 다르네. 취미로라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그럴 시간이 없어.” 하지만 곧이어 임신과 출산 소식을 전하는 언니의 어투는, 모리조에게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습니다.
홀로 남은 모리조의 마음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즐거움과 ‘정석적인 삶에서 이탈했다’는 불안감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습니다. 어쨌거나 모리조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그림을 더욱 열심히 그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작업에 열중하는 사이, 인상주의의 물결이 어느새 모리조의 발목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인상주의 전까지 ‘좋은 그림’은 역사나 신화, 종교 속 사건을 매끈한 표현으로 그려낸 고전주의 미술이었습니다. “완벽한 완성도의 작품만이 영원히 위대한 예술로 남을 수 있다”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인상주의는 달랐습니다. 가벼운 붓 터치로 순간을 포착해서 관객들이 눈과 머리로 그 순간 자체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걸 목표로 했습니다. 그래서 왕립 아카데미의 주류였던 고전주의 미술과 인상주의는 충돌했고, 인상주의 화가들은 살롱 전시를 거부당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하는 수 없이 사비를 털어 자신들만의 전시를 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제대로 된 미술 작품은 왕립 아카데미의 인정을 받고 살롱에서 전시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깨진 겁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따로 연 전시는 국가 기관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그림이 팔리지 않았을 때 전시 비용 등 손해를 떠안아야 한다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뒤집어보면 이건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국가 기관의 허락 따위를 받지 않아도 작품을 살 사람만 있다면 누구든 화가로 먹고살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여성에 대한 제약도 훨씬 약화됐습니다. ‘드디어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왔어.’ 모리조는 환호했습니다.
모든 시대적 상황이 여성 직업 화가들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학술 지식이 필요한 역사화, 여성이 그리는 게 금기시됐던 누드화 등 여성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고전주의 미술과 달리 인상주의는 일상을 그렸습니다. 아마추어 여성 화가들이 오래전부터 다뤄왔던 주제였지요. 인상주의 화가들은 밖에 나가 그림을 그리는 걸 선호했습니다. 이를 가능케 한 물감 튜브의 발명은 힘이 약한 여성도 쉽게 그림 재료를 들고 다닐 수 있게 해줬습니다.
1874년 훗날 전설이 된 첫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평론가들은 혹평을 쏟아냈습니다. 유력 일간지 르 피가로의 유명 평론가 알베흐트 볼프(Albert Wolff)가 전시를 보고 쓴 평론 문구는 아직도 회자됩니다. “야망의 광기에 사로잡힌 대여섯명의 미치광이들이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그 중엔 여자도 하나 있어요.”
그 평론이 신문에 실린 날. “이걸 쓴 놈과 결투하고 싶군.” 신문을 읽던 한 남자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의 이름은 유진 마네(1833~1892·기사에서는 유진으로 표기). 에두아르 마네의 동생이었습니다.
유진은 수채화나 파스텔로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이자, 훗날 소설을 출간하는 문필가이기도 했습니다. 출간된 소설에 녹아 있는 유진의 생각을 보면 그의 이상형은 당대 사람들과는 꽤 달랐습니다. ‘현모양처’이자 삶의 도우미를 원했던 당시 대부분의 남성과 달리 그는 우아하면서도 용기 있고 강인한, 존경할 수 있는 동등한 여성을 원했습니다. 모리조는 그 조건에 딱 들어맞는 여성. 그러니 유진이 모리조를 사랑하게 된 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1874년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며 화가로서의 커리어를 꽃피우기 시작한 모리조도 슬슬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집안의 압박이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잔소리도 듣기 싫었지만, 부모님을 실망시키기 싫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두 번째는 사회적인 제약. 빠르게 달릴수록 공기의 저항이 심해지듯이, 모리조가 유명해지는 만큼 ‘어딜 미혼 여자가 설치냐’는 사회적인 편견과 제약은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남자와 결혼할 수 없는 노릇. 모리조는 몇 가지 양보할 수 없는 조건을 세워 봤습니다. 먼저 인상주의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남자여야 했습니다. 거기에 자신의 커리어를 위협하거나 방해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했고, 그러려면 관대한 성격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리조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고요. 서른세 살이라는, 당시로서는 많은 나이도 이해해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 남자가 어디 있겠어?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조건이야.’ 헛웃음을 짓던 모리조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남자가 떠올랐습니다.
그 해가 다 가기도 전인 12월 22일, 둘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한 달 뒤 모리조는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정직하고 훌륭한 남자를 만났어. 오랫동안 불행하게 살다가 드디어 삶의 긍정적인 면을 보게 됐네. 그림을 그리는 데 모델이 필요해서, 불쌍한 남편이 언니를 대신하고 있어. 그런데 언니보다 모델 서는 실력이 훨씬 못해서 금방 지쳐버려.” 행복이 묻어나는 편지를 본 언니는 아마도 활짝 웃었을 겁니다.
모리조의 구도와 색채는 모네와 드가, 메리 카사트와 르누아르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술사학자 찰스 스터키는 “모리조의 시각을 포착한다는 아이디어에 대한 관심, 흰색 물감의 실험적인 사용, 속기하는 듯한 거친 붓질 등의 기법을 다른 화가들이 보고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인상주의자들의 구심점이기도 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 중 대부분은 자의식이 엄청나게 강해서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니 모였다 하면 서로 싸우기 일쑤였지요. 하지만 모리조는 존경할 만한 인격의 소유자여서, 좌충우돌하는 인상주의자들을 한데 묶는 역할을 했습니다. 친척이 된 마네, 예전부터 알고 지낸 드가를 비롯해 르누아르, 모네, 시슬리, 피사로, 메리 카사트와도 항상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한편으로 그녀는 ‘슈퍼 맘’이기도 했습니다. 1878년 서른일곱 살 때 딸인 줄리를 낳은 그녀는 작품 활동과 육아를 병행했습니다. 출산 이후 모리조의 편지와 일기, 그림 등 모든 창작은 딸을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최초의 ‘화가이자 어머니’답게 모리조의 아이 그림은 이전에 나왔던 그림들의 ‘어머니에게 모든 걸 맡기고 의존하는 아이’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그녀의 그림 속 모녀는 친밀하면서도 서로 존중하고 배우며 성장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이런 성취는 모리조의 타고난 재능과 강박에 가까운 노력에 행운까지 더해진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남편 유진의 기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유진은 딸과 시간을 보내는 좋은 아버지는 물론이고, 아내의 그림 딜러이자 짐꾼으로 활약했습니다. “당신은 그림에만 집중해.” 유진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1882년 모리조가 비를 맞으며 전시 준비를 도와준 유진에게 보낸 편지가 이를 증명합니다. “당신이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지 잊을 수 없을 거야. 너무 감동적이지만 당신이 너무 지쳐서 죽을까 봐 걱정되고 괴로울 정도야.”
야속하게도 행복한 세월은 금세 지나가 버렸습니다. 존경하는 스승이자 친척이 된 에두아르 마네는 1883년 숨을 거뒀습니다. 딸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는 것만이 위안이었습니다. 모리조와 유진도 서서히 나이를 먹고 병이 들었습니다. 1892년, 유진은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리조는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3년 뒤인 1895년 3월 2일, 모리조도 5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엔 딸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인상주의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내 사랑 줄리, 죽어도 널 사랑해. 네 결혼식까지 살아남고 싶었어. 넌 나를 한 번도 슬프게 한 적이 없었지. 너에겐 아름다움이 있고 돈도 있으니 잘 사용해. 인상주의자 친구들의 작품은 친척들에게 나눠주고, 인상주의자들의 미술관이 지어지게 되면 그걸 꼭 적극적으로 돕도록 해.”
그리고 또다시 시간은 흘렀습니다. 여성 화가라는 이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이유, 개인적인 기록이 흩어져서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모리조의 존재가 희미해졌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성 화가에 대한 연구와 재평가 바람이 일면서 모리조는 오늘날 인상주의의 핵심 화가로서 제대로 된 위상을 회복했습니다. 모리조의 삶을 되짚는 과정에서 뒤늦게 발견된 기록 중에는, 스케치북 한쪽에 낙서하듯 적힌 이런 글귀도 있습니다. “내 목표는 그림으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한 욕심이겠지.”
그 말대로 캔버스에 한순간을 온전히 담는다는 모리조의 목표는 결코 이루지 못할 불가능이었습니다. 사진이 나오고 동영상이 나오고 4D 영화가 나온 지금도, ‘시간을 고정하는 것’만큼은 할 수 없으니까요.
자세히 따져 보면 모리조가 추구했던 다른 소망도 완벽하게 이뤄진 건 없습니다. 재평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리조의 위상은 자신이 따라 그렸던 라파엘로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모네에 비해 다소 낮다는 게 중론입니다. 오래오래 남편과 해로하고 싶다는 소망, 딸의 결혼식을 보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도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물러서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모리조의 깃털 같은 붓질은 자세히 뜯어보면 흐트러져 보입니다. 멋대로 마구 휘저은 것처럼요. 하지만 조금 멀리서 바라볼 때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공기 중의 빛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모리조의 최고 작품들은 그 경지를 한 단계 더 넘어섭니다. “모리조의 그림은 그림으로 전달할 수 없는 일종의 포근함과 환상적인 느낌을 담고 있다”(찰스 스터키)는 게 평론가들의 얘기입니다.
인상주의란 ‘순간을 담는다’는 목표를 극한까지 추구하는 것.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 간절한 마음과 화가들의 인간적인 삶에 우리는 감동합니다. 닿을 수 없는 이상, 사회의 벽, 육아와 일의 완전한 병행이라는 불가능한 목표에 끊임없이 도전하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았던 모리조는 그 완벽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인상주의다운 인상주의자’라는 평가는 이렇게 모리조의 삶으로도 증명됩니다.
<i>**이번 기사는 Berthe Morisot(Anne Higonnet 지음)를 중심으로 Berthe Morisot: The Correspondence with Her Family and Friends(편지 모음집), Berthe Morisot : Impressionist(Charles F. Stuckey, William P. Scott 등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i>***보내주신 성원 덕분에 두번째 책이 올해 내로 출간됩니다. 관련 작업과 재충전을 위해 연재는 당분간 쉬어 갑니다. 한국에서 열리는 미술 전시와 시장 관련 소식은 평소처럼 계속 전해드리겠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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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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