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F 베끼기' 관행 만연한데…방지책이 유명무실한 이유

입력 2024-05-21 08:40   수정 2024-05-21 08:41


"베끼기를 방지할 제도가 없는 게 아닙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겁니다."

'상장지수펀드(ETF) 베끼기' 관행에 대해 전 자산운용사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베끼기 관행을 막을 수 있는 제도는 갖춰졌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2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비만치료제 등을 중심으로 유사한 ETF 상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작년 2차전지를 중심으로 나타난 상품 베끼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올해 출시된 비만치료제 ETF는 총 3개다. 삼성자산운용이 2월 14일 'KODEX 글로벌비만치료제TOP2 Plus'를 선보였다. 약 2주 뒤 KB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이 각각 '글로벌비만산업Top2+'(2월 27일), 'TIGER 글로벌비만치료제TOP2Plus'(2월 29일)를 잇따라 내놓았다. 세 상품 모두 글로벌 비만치료제기업 일라이 릴리와 노보 노디스크를 50%가량 편입하고 있다.

유사 상품이 잇따라 등장하는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2차전지 소재·부품·장비(소부장) ETF다. 지난해 4월 신한자산운용이 상장한 'SOL 2차전지소부장Fn' ETF가 인기를 끌자, 미래에셋자산운용과 삼성자산운용이 잇따라 2차전지 관련 소부장 ETF를 시장에 내놨다.

한 운용사가 특색 있는 상품을 내놔도 다른 운용사에서 비슷한 구조의 상품을 곧바로 내놓는 이유는 쉽게 돈을 벌 수 있어서다. 상품 개발하는 노력 크게 들이지 않고, 해당 상품을 먼저 내놓은 운용사들이 상품을 소개하면서 넓혀놓은 시장에 빠르게 들어와 나눠먹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상품 독창성 대신 수수료나 이벤트 등의 경쟁으로 번지는 게 문제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상품이 비슷하다보니 결국엔 낮은 수수료를 찾기 때문이다. 자산운용사 상품 담당 개발자들이 베끼기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ETF 시장 전반의 경쟁력이 약해질 것으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베끼기 관행을 끊기 위해 한국거래소는 팔을 걷고 나섰다. 독창적 ETF를 개발하면 6개월 배타적 사용권을 주는 '상장지수상품(ETP) 신상품 보호제도'의 심사 기준을 변경했다. ETP 신상품 보호제도 개선안의 핵심 내용은 정량 평가를 정성 평가로 전환하는 것이다. 지난 2월부턴 거래소 내부 관계자로 구성된 ETP 신상품 심의위원협의회에서 독창성, 창의성, 기여도 등을 항목별로 나눠 상품을 평가해 보호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 기존에 거래소는 신상품 보호 여부를 결정할 때, 상품별 기초지수와 구성 종목, 중복 비율 등을 정량적으로 평가한 것에서 확장한 개념이다.

다만 거래소는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개선안 도입 후 신상품 보호를 신청한 자산운용사가 없기 때문이다. 베끼기 관행을 근절해야 한단 목소리는 높지만, 관련 제도는 외면받는 실정이다.

금융투자협회(금투협)에도 베끼기를 막을 수 있는 제도가 있다. 금투협은 '신상품 보호' 방안을 규정하고 있다. 신상품을 개발한 업체가 금투협에 '배타적 사용권'을 부여해달라고 신청하면 신상품심의위원회가 소집된다. 심의위원회는 해당 상품의 독창성, 투자자의 편익 제고 정도 등을 심사해 배타적 사용권 부여 여부와 기간을 정한다. 심의위원회는 금융 상품 관련 경험이 풍부한 자 최대 4인, 금융투자회사의 상품 또는 서비스 개발 담당 인원 최대 2인 등 6명 이내로 구성된다.

문제는 심의위원회가 5년 가까이 열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2019년 10월 25일 미래에셋대우(현 미래에셋증권)가 '정해진 구간 ELB'에 5개월 배타적 사용권을 인정받은 게 마지막이다. 금투협 관계자는 "1년에 한두 번 전화 문의는 들어오고 있지만, 2019년 이후 공식적으로 접수된 건은 없다"고 말했다.

운용업계에선 실효성이 낮다고 지적한다. 지수를 추종하는 ETF 특성상 독창성을 인정받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독창성을 판단하는 기준도 모호하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상품 구조는 비슷한데, 마케팅이 차별화된 상품도 독창적 상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지 어렵다는 입장이다. 또 거래소와 금투협은 정성평가로 독창성을 심의하는데 심의위원의 주관적 판단이 가미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A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중소형 운용사가 새로운 상품을 내놓은 후 대형사가 조금 다른 상품을 선보여 중소형사의 파이를 뺏어가는 경우가 있다"며 "베끼기 여부를 판단하는 게 쉽지 않고, 우회할 수 있는 방법도 많아 관행이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B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배타적 사용권 관련 제도가 있지만, 판단을 받는 제품은 거의 없다"며 "독창성 기준이 모호해 후속 ETF를 내놓은 업체에 '베꼈다'라고 주장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관련 제도 도입 후 금투협에서 독창성을 인정받은 ETF는 2010년 키움투자자산운용(옛 우리자산운용)의 '우리 KOSEF 통안채' ETF뿐이다.

그러면서 "예를 들어 반도체 ETF의 경우 큰 종목 몇 개를 공통으로 편입하고, 자그마한 회사를 다르게 넣으면 '베끼기'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난감하다"며 "현재 ETF 시장은 성장하고 있어 베끼기 이슈가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지만, 시장 성장세가 꺾이면 문제가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제도는 갖춰져있지만, 베끼기 관행이 끊어지지 않아 각 운용사가 상도의를 지키는 것이 최선이라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나온다. 자정 작용을 통해 베끼기 논란이 불거질만한 행위를 원천 차단하고, 업계의 경쟁력을 끌어올리자는 주장이다. 운용업계 관계자는 "미국 ETF 시장은 경쟁이 치열하지만, 다른 운용사가 개발한 영역을 가급적 침범하진 않고 있다"며 "국내 자산운용업계에서도 2010년대 후반까진 상도의가 지켜졌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은 모습"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금투협 차원에서 업계 간담회를 소집해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진영기 한경닷컴 기자 young7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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