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아파트 이름이 너무하네

입력 2024-05-21 18:01   수정 2024-05-22 00:07

분양의 계절이다. 지난달 인천의 한 아파트 견본주택에 사흘 동안 2만 명이 몰렸다. 짧으면 2년 길면 20년 이상 통장을 채운 이들이 나들이 삼아 나섰다. 아파트 공화국에 번듯한 집 한 채 마련하기 위해서다.

‘도곡동래미안레벤투스’ ‘여주역자이헤리티지’ ‘라디우스파크푸르지오’…. 분양에 들어갔거나 앞둔 단지들이다. 그런데 헤리티지는 알겠는데 레벤투스는 뭐고, 라디우스는 뭘까? 찾아봤다. 레벤투스(reventus)는 라틴어로 ‘귀환’이란 의미로 부와 명예의 재탄생을 기원하며 지었다고 한다. 라디우스(radieuse)는 프랑스어로 ‘빛나는’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빛나는 공원’ 아파트라는 얘기다.
영어도 모자라 불어·라틴어까지
아파트 이름이 가관이다. 영어도 모자라 프랑스어에 라틴어까지 동원한다. 게다가 길어지고 있다. 어디 누가 산다고 하면 한 번 들어선 쉽게 기억하지 못할 지경이다. 서울, 수도권 할 것 없다. 개포래미안블레스티지, 디에이치아너힐즈, 북수원이목지구디에트르더리체….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데 아주 고약하다.

한국인에게 아파트는 욕망의 현신이다. 높아지는 층수만큼이나 닿기가 쉽지 않다. 펜트하우스에 이르면 더 할 말이 없다. 그들만의 세상, 건설사들이 겨냥한 것은 이 지점이다. 집주인도 함께 투사했다. 그렇게 해서 ‘스카이캐슬’이 탄생했다. ‘다름’과 ‘계급’을 드러내기 위해 언어를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한때 한글 아파트 이름이 유세 떤 적도 있다. 래미안(來美安), 푸르지오, e편한세상. 2000년대 초반 건설사들이 내세운 ‘브랜드’다. 한글을 바탕으로 중의적인 영어를 조합했다. 부영은 순우리말 ‘사랑으로’를 앞세웠다. 1990년대 후반 고양과 분당에 신도시가 들어설 때 단지 이름에 공동체 의미를 담기도 했다. 일산신도시에선 정발마을 백마마을 강촌마을 별빛마을이, 분당에선 까치마을 상록마을 한솔마을이 그랬다.

하지만 이젠 건설사 이름조차 영어로 다들 바꾸는 추세다. 대림산업이 DL이앤씨로 변경했고 SK건설이 SK에코플랜트로, 최근에는 포스코건설이 포스코이앤씨로 동참했다.
자율로 못하면 규제 가해질 수도
아파트 이름에 외국어를 쓰는 ‘원초적 본능’은 고급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가 한국에 침투한 이후 선진적인 것, 고급스러운 것, 인텔리겐차의 언어라는 인식이 심어졌다. 이는 본질에서 전근대적이다. 신문물이 선진인 것이지 언어가 선진·고급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어와 영어는 다른 진화 단계를 거쳐 왔을 뿐, 우열한 관계가 아니다.

불편한 외국어 아파트 이름을 계속 두고봐야 할까. 서울시가 지난 3월 <아파트 이름 길라잡이>를 발간했다. 이 책자에선 한글 이름 사용을 적극 권고했다. 심각성을 인지했다는 뜻이다. 1974년 도입한 규제안처럼 외국어 이름 아파트엔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는 수준의 초강력 조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현 상황에 문제가 많다는 점만은 분명히 했다.

권고안이 나온 후 새로 분양하겠다는 아파트 이름도 변화가 없다. 꼭 레벤투스와 라디우스여야 하나. 자율이 작동하지 않으면 규제가 들어서기 마련이다. 건설사는 물론 집주인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지켜야 할 것은 재산과 권리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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