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 칼럼] 잊혀진 최고 발명품 '법인'의 복권

입력 2024-05-21 18:25   수정 2024-05-22 00:08

호모사피엔스가 지배종이 된 건 ‘허구를 상상하고 실재화하는 능력’ 덕분이라는 게 유발 하라리의 견해다. 종교·화폐·민족부터 인터넷·AI·메타버스까지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허구의 실재화 능력’이 만들어낸 탁월한 발명품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법인(기업)’이다. 자연인처럼 권리 행사, 의무 부담 능력을 부여해 의인화한 법인은 등장 초기 냉소의 대상이었다. 18세기 말 영국 대법관 에드워드 서로는 “처벌할 육체도, 비난할 영혼도 없지 않느냐”며 법인격을 부정했다. ‘돈의 결합체’를 인격체로 의제한 발군의 상상력을 규범적 사고의 법률가가 따라잡긴 버거웠을 것이다.

법인은 불과 200여 년 만에 지구를 가난에서 해방시켰다. 절묘한 유한책임, 수월한 이익 실현, 높은 영속성이라는 특질이 모험과 창의를 촉발한 결과다. 하지만 오늘 한국에서 법인에 대한 인식은 서로 대법관 시절 영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법인격에 대한 이해는 일천하고 반기업 정서는 광범위하다.

그런데, 바로 지난주 작은 반전이 있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쿠팡·두나무 그룹 ‘동일인’으로 총수 김범석 의장, 송치형 회장 대신 쿠팡㈜, 두나무㈜를 지정했다. 법인의 행위능력이 자연인처럼 온전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한 결정이다. ‘기업집단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동일인은 여러 의무를 부과받고 위반 시 형사처벌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법인 동일인이어도 상호·순환출자, 사익편취, 부당 내부거래 등 적발과 처벌에 실무적 공백은 없다”는 게 공정위 설명이다.

갈라파고스 ‘동일인 제도’로 비판받는 것과 별개로 공정위가 법인격의 무결성을 확인해준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법인의 복권’은 시장 내 무수한 오해와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선결조건이다. 예컨대 ‘경영진은 주주 이익에 복무해야 한다’는 통념도 법인격을 경시하는 자연인 편향적 오해다. 주주는 절대자라기보다 보유 주식에 부여된 권리 내에서 경영에 훈수를 둘 수 있는 제한적 주인이다. 대주주든 소액주주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회사에 불리한 의사결정을 감행하는 사례마저 빈번하지 않은가. 큰 손실이 나도 제각각의 유한책임만 지면 그뿐이라는 점 역시 주주의 ‘주인성(性)’을 약화시킨다.

그렇다면 누가 법인 내 사건·사고·손실의 무한책임자인가. 권리·의무 행사자로 모자람 없는 법인 자신이다. 이런 ‘법인의 주인성’은 상법의 기본정신이기도 하다. ‘이사의 충실의무’ 조항은 ‘이사는 회사를 위하여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최근 ‘회사를 위하여’를 ‘회사와 주주를 위하여’로 바꾸자는 요구가 거세다. 개미투자자를 의식한 야당의 포퓰리즘이건만, 지난주 월가를 방문한 금융감독원장까지 맞장구쳤다. 아무리 소액주주 보호 명분을 내걸어도 법인과 법인 자본주의 본질 훼손은 금물이다.

‘밸류업’도 주주보다 법인 이익에 방점을 둬야 한다. 주주환원은 주가를 높여 특정 시점 주주에게 이득을 안겨주지만 이론적으로 기업가치와 무관하다. 과도한 환원은 외려 독이다. 초우량기업 보잉, 스타벅스의 ‘주주 최우선 경영’은 자본 완전잠식으로 끝났다. AI 전쟁에서 뒤처진 애플, 초격차를 잃어가는 삼성이 시사하는 바도 적잖다. 두 회사 모두 팀 쿡, 이재용 체제 출범 후 10여 년간 자사주 소각·배당 확대로 내달린 ‘주주환원 모범기업’이다.

중대재해처벌법 등 한국의 수많은 갈라파고스 규제도 법인격 망각의 산물이다. 사고 책임은 법인이 고용한 자연인(오너, 경영자)이 아니라 온전한 권리·의무 주체로서의 법인이 감당할 몫이다. 상속세·거버넌스·민희진 사태 등 거의 모든 이슈의 해법 역시 법인의 핵심 목표인 ‘장기 지속 성장’이 기준이어야 한다. 공정위발 작은 반전이 거대한 나비효과를 불러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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