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 칼럼] '언덕 위의 구름'을 넘어

입력 2024-05-23 17:45   수정 2024-05-24 00:14

2009년 일본 자민당은 중의원 선거에 참패해 55년 만에 정권을 내줬다. 이듬해인 2010년 일본 경제의 최전성기(1982~1987년)를 이끌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보수의 유언>을 출간했다. ‘언덕 위의 구름을 넘어’는 이 책의 마지막 챕터 제목이다.

<언덕 위의 구름>은 60·70대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시바 료타로의 역사 소설이다. 메이지 유신부터 러일전쟁까지를 배경으로 근대화로의 이상에 헌신하는 인물들을 그렸다. 나카소네 전 총리 역시 자신의 책에서 시대적 이상을 ‘언덕 위의 구름’에 은유한다. 전후 복구와 고도성장을 이끌었던 자민당이 낡은 지향을 뛰어넘는 새로운 언덕 위의 구름을 제시하지 못해 일본 사회 전체가 ‘잃어버린 20년’으로 굴러떨어지고 있다고 반성했다. ‘유언장’을 쓴 보수의 부활 여부도 새로운 시대적 이상을 제시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고 했다.
상반된 韓日 보수의 반성
한국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에서도 지난달 총선 패배에 대한 반성이 한창이다. 패배 원인을 샅샅이 규명하겠다며 관련 특별위원회까지 구성했다. 다만 반성의 대상은 총선 한두 달 전에 일어난 사건에 집중되고 있다. 이종섭 전 호주대사 임명, 윤석열 대통령의 ‘대파’ 발언, 공천 적절성 등이 선거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다.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에게 얼마나 책임을 지울지를 놓고는 차기 당권을 염두에 둔 볼썽사나운 다툼까지 벌이고 있다.

2016년 이후 보수는 총선에서 3연패했다. 지금과 같은 지엽적인 진단으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열세가 구조화됐다. 당장 핵심 지지층인 산업화와 6·25전쟁 세대가 4년에 한 번 선거를 치를 때마다 100만 명씩 자연 감소하는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

결국 20·30대를 끌어들이고 40·50대를 품을 새로운 언덕 위의 구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보수가 이끌었던 산업화의 이상은 옛 기억으로 저물고, “그래도 유능하다”는 신화 역시 국정농단 사태로 허물어졌다. <보수의 유언>에서 나카소네 전 총리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요즘 정치인들은 초보 의사처럼 눈앞의 임상적인 문제에 대한 대응밖에 모른다. 체계적이고 장기적 시야에 입각해 정책을 생산하는 정치인이나, 깊은 역사관과 철학이 뒷받침된 대국적인 관점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새로운 길 보여야 선택 받아"
책의 한국어판이 출간된 2011년,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보좌진은 이 책을 주제로 여의도연구원이 중심이 된 세미나를 열었다. 일본 보수의 쇠퇴를 타산지석 삼기 위해서였다. 자유선진당까지 합쳐 보수정당 의석이 190석을 넘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2024년 현재 여의도연구원은 정책 연구 인력 4명의 조직으로 쪼그라들었고, 100석을 간신히 넘긴 여권에선 과거와 같은 지적 활력이 실종됐다.

한국이 저성장과 인구 감소에 접어든 가운데 국민은 새로운 국가적 방향성을 제시할 정치세력에 목말라 있다. 국민의힘이든 더불어민주당이든 이 같은 과제를 달성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2026년 지방선거, 2027년 대선에서도 선택받을 것이다. 국민의힘 총선 백서에서도, 다음주 문을 여는 22대 국회에서도 언덕 위의 구름을 넘는 새로운 비전을 볼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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