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근 발간한 보고서 ‘한국의 중산층은 누구인가’가 요즘 화제입니다. 중산층은 항상 많은 관심을 받는 주제인데요, 이 보고서는 중산층 기반이 흔들린다는 통념과 달리 중산층 비중이 유지 또는 확대됐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서입니다. 민감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어 지난 1월에 낸 보고서를 총선이 지난 이달 초 공개했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중산층 분류(중간소득의 75~200%)를 적용할 경우, 2011년 51.9%였던 국내 중산층 인구 비중은 10년 뒤인 2021년 57.8%로 늘어났습니다. 이는 공적 이전소득을 포함해 실제로 각 가구가 쓸 수 있는 처분가능소득을 기준으로 삼은 겁니다. 코로나19 사태 때 정부 지원금이 많이 풀린 영향이 없지 않겠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중산층 비중은 소폭이나마 증가했습니다.
그럼에도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 “소득불평등이 악화하고 있다”라는 얘기는 왜 자꾸 나오는 걸까요? 서구 선진국 중에서도 중산층이 줄고 있다는 통계를 발표하고, 국내 집값 상승 등 자산소득의 증가세가 근로소득 증가세를 압도하던 기억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습니다. KDI 보고서가 주목을 끄는 것은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낮게 평가하는 고소득층의 소득 여건이 악화되면서 ‘중산층 위기론’이 싹텄을 수 있다는 진단입니다. 중산층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됐고 왜 중요한지, 과연 국내에서 중산층이 감소하고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는지 등을 4·5면에서 살펴봤습니다.
소득만 따지는 한국 수준 돌아봐야죠
중산층은 계급적 분류는 아닙니다.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나눠본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가운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요. 자산이나 소득이 상류층과 하류층의 가운데 정도인 집단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서구에선 ‘중간계급(middle class)’ 또는 경제학적 의미에서 ‘중위소득계급(middle income class)’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르는 중산층(中産層)이란 용어가 이 계층의 성격을 좀 더 정확히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넓은 중산층 범위
중산층은 근대의 산업화 및 도시화 과정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계층입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도시의 중간계급, 또는 도시와 농촌의 프티부르주아(생산수단을 갖고 스스로 노동하는 소시민) 가운데 경제적으로 안정된 집단, 소득이 높은 상층 노동계급까지 포함합니다. 경제학자들은 아무래도 측정할 수 있는 소득이나 소비 수준을 근거로 중산층을 정의합니다. 대표적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가구의 소득을 쭉 늘어놓고 한가운데 소득(중위소득)의 75~200%를 벌어들이는 가구를 중산층으로 분류합니다. 이를 기준 삼으면 국내 4인 가구의 경우 올해 월 430만~1146만원의 소득을 올리면 중산층에 포함됩니다. 생각보다 범위가 넓지요? 경제학 이외 분야의 학자들은 중산층을 계급이나 소득계층이 아닌, 일종의 ‘지위 집단(status group)’으로 보기도 합니다. 즉 소득수준 외에 생활양식과 소비 취향, 직업, 교육수준 등에서 동질성을 보이는 집단이란 점에 주목하는 거죠.
번영의 엔진, 사회 안정의 기초
근대 이전엔 계급 혹은 계층이 지주 등 엘리트 지배계층과 다수의 피지배계층으로 구성됐습니다. 여기에 개인적 노력으로 재산을 모으고 신분도 끌어올린 중산층이 근대 이후로 등장하게 됩니다. 시대적 배경으로 보면 급격한 과학기술의 혁신, 자유주의와 합리주의 사고의 확산, 폭발적 경제성장 등이 있었죠. 또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법률·금융·의학·무역과 같은 전문 분야 지식을 필요로 하는 직종의 수요가 늘어났습니다. 이들이 중심이 된 중산층은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강조한 근검절약·성실·신중과 같은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었어요. 근대화와 산업발전의 전위(vanguard)였던 거죠.
20세기 들어 서구 각국의 중산층 인구 증가는 능력주의(meritocracy)가 인정되는 평등사회를 앞당기게 됩니다. 미국 코넬대의 스튜어트 블루민 교수는 중산층에 대해 ‘사회가 얼마나 평등한지 나타내주는 척도’라고 강조했습니다. 중산층은 또 자본가와 노동자의 극한 대립, 사회혁명으로 이어지는 불안정하고 위험천만한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중산층 확대는 20세기 선진국의 공통 현상이었는데요, 개발도상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개발도상국의 경제성장은 중산층 확대, 인적자본 축적과 투자 확대라는 경로를 통해 이뤄졌다는 경제학자들의 연구가 많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OECD는 중산층을 ‘번영과 경제성장을 위한 엔진’ ‘포용적 성장의 토대’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가장 완벽한 정치적 공동체란 중산층이 장악한 정치공동체다. 중산층 인구는 수적으로 상류층과 하류층보다 많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도를 실천할 수 있는 부류라고 본 거죠. 그래서 중산층이 두터운 나라가 가장 잘 운영되는 국가라고 주장했습니다. 선견지명이지요?
정신적 가치 중시하는 서구
위에서 밝혔듯이 사회학자 등은 중산층을 소득과 자산의 잣대로만 보지 않습니다. 이런 전통이 서구에선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한국에선 중산층 하면 집, 자동차, 급여 수준 등 물질을 먼저 따지지만, 서구에선 의식 수준, 행동양식, 정신적 가치 등을 기준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1969~1974년 프랑스 대통령을 지낸 조르주 퐁피두는 “외국어 하나 정도는 할 수 있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으며, 환경문제에 민감할 것”을 좋은 삶의 질의 조건으로 들었는데요, 중산층이 갖출 만한 자질이라 해석되기도 합니다.
2. 중산층 확대가 개발도상국의 발전에 왜 중요한지 생각해보자.
3. 중산층의 이상적인 인구 비중은 어느 정도일까?
AI시대에 오히려 늘어날 가능성 주목
중산층이 튼튼해야 사회 안정과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얘기는 이제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여집니다. 남미의 정치·경제가 불안한 데에는 중산층이 받쳐주지 못해서라는 설명이 붙어도 큰 이견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중산층을 민주주의의 보루라고 얘기하며 중요성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선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는 얘기들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작년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설문에서 자신이 중산층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는 응답이 42%가 나온 것을 가지고 1980년대 70%에 달했던 한국 중산층이 쪼그라들었다는 식의 해석을 하는 거죠. 이는 ‘한국에서 중산층이 사라진다’라는 화두로 이어집니다.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낮게 평가
KDI 보고서가 주목을 끄는 것은 이런 주장 또는 인식이 객관적 근거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어서입니다. 보고서를 보면 순수하게 가구가 벌어들이는 소득(시장소득)을 기준으로 2011년 49.9%였던 국내 중산층 비율은 2013년 52.6%까지 높아졌다가 작년 50.7%로 소폭 하락했을 뿐입니다. 정부의 각종 이전지출(지원금)을 포함한 가구의 처분가능소득을 기준 삼으면 이 비중은 2011년 51.9%에서 2021년 57.8%로 증가세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처분가능소득을 기준으로 한 통계청의 가장 최근 자료를 봐도 중산층 비중은 2019년 4분기 61.4%에서 작년 4분기 62.3%로 늘어납니다.
그렇다면 검증되지 않은 ‘중산층 위기론’이 퍼진 이유는 뭘까요? 먼저 해외의 흐름이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중산층은 1995년 70%에서 2019년 63%로 축소됐습니다. 사무·공장자동화로 실업 위험이 커지고 소득불평등은 심화하면서 젊은 세대나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이 중산층에 진입하기 힘들어진 때문입니다. OECD 평균 중산층 비중은 60%대 초반 수준인데, 2022년 미국은 51.2%, 복지국가라는 스웨덴도 65.2%에 머물고 있습니다. 또 지난 300년에 걸쳐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토마 피케티의 노동분배소득 감소 주장이 인기를 끌면서 세계 각국에서 중산층 붕괴와 축소 위기감이 커졌고, 글로벌 이슈로 확산된 영향도 있을 겁니다.
KDI 보고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느끼는 주관적(심리적) 중산층도 그 비중에서 큰 차이가 없다고 밝힙니다. 통계청 ‘사회조사’에서 자신이 속한 계층이 ‘상·중·하’ 가운데 어디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질문에 ‘중층’이라고 답한 사람은 2009년 이래 57~58%에서 큰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KDI가 월평균 소득 700만원 이상 가구 구성원 설문을 해보니 자신이 상층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11.3%에 불과했고, 중층이라고 인식한 이가 76.4%에 달했습니다. 중산층에 속하면서도 자신을 하층이라고 응답한 비율도 35~40%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보고서는 상위소득계층의 상당수가 자신을 중산층으로 인식하고, 실제 중산층은 그보다 낮은 하층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중산층 위기론을 불렀다는 잠정 결론을 내립니다. 상위소득계층에서 뭔가 불안 요소가 커지고, 중산층에서도 집값 급등 같은 요인으로 자산소득이 많은 사람과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상대적 박탈감이 생겨난 게 위기감을 키웠다는 겁니다.
AI가 중산층 늘릴 수도
중산층 위기론은 다음 세대에 본격화할 수도 있습니다. 인공지능(AI)이 일자리를 빼앗는 미래가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전문직 종사자가 많은 중산층으로선 고용 불안과 소득감소 위기감을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AI 등장의 효과가 반대로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AI를 활용해 의사나 변호사를 돕는 준 전문 인력이 새로운 중산층을 만들어낼 것이란 전망인데요, 데이비드 오토어 미국 MIT 경제학과 교수가 그런 주장을 펼치는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는 전문지식을 흡수한 AI를 잘 활용한다면 지금은 의사, 변호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대학교수와 같은 엘리트 전문가에게만 허용된 고위험 의사결정을 일반 노동자들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이들의 임금과 소득수준이 올라 중산층이 더 증가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AI가 중산층을 살려낼 수 있다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2.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한국만의 현상인지 토론해보자.
3. AI시대가 몰고올 노동시장의 변화, 중산층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보자.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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