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 1위 임상대행 업체 시믹이 도쿄 본사에서 마련한 한·일 제약바이오 네트워킹 행사장에서 만난 한 현지 제약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뜻밖의 말이라 얼른 믿기지 않았다. 일본이 제약산업 선진국이어서다. 일본의 제약산업 규모는 2021년 기준 약 106조원으로 한국(25조4000억원)보다 네 배 이상 크다. 다케다, 오츠카 등 세계 30위권에 드는 대형 제약사도 4곳이나 있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만 5명을 배출한 기초과학 강국이기도 하다. 글로벌 블록버스터 신약이라고 내세울 게 전무한 한국의 초라한 현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런 일본 제약산업의 고민은 취약한 산업 생태계였다. 쟁쟁한 제약사는 한둘이 아니지만 될성부른 바이오벤처는 찾기 어렵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일본 벤처기업의 임상 데이터는 믿을 수가 없다”고도 했다. 의약품 임상데이터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대형 제약사들이 바이오벤처의 신약을 가져가 개발 단계를 높이는 사례를 일본에선 찾기 어렵다고 했다.
이유는 결국 ‘돈’이었다. 2000년대 초 일본에도 한국처럼 바이오벤처 붐이 불었다. 하지만 바이오 붐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 증시의 높은 상장 문턱 때문이었다. 다른 업종과 달리 10년 넘게 수천, 수조원을 쏟아부어야 성공할까 말까 한 신약 개발 벤처가 매출과 이익 상장 요건을 맞추긴 어려웠다. 상장이 막히자 벤처캐피털이 투자금을 회수할 길도 막혔다. 바이오벤처 투자의 선순환 고리는 그렇게 끊기고 말았다. 지난해 일본 바이오벤처가 유치한 투자금은 7237억원이었다. 자금줄이 말랐다고 아우성인 한국(1조7102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지난해 도쿄 증시에 상장한 기업 99개 중 바이오기업은 3개뿐이었다. 행사장에서 만난 현지 관계자는 “상장이 거의 유일한 투자금 회수 수단인데 여의치 않으니 ‘한 곳만 걸려라’ 식으로 여러 기업에 투자금을 소액으로 분산 투자하는 형태가 고착화됐다”며 “일본 바이오벤처가 기관투자가로부터 한 번에 투자받는 액수는 한국의 10분의 1 정도”라고 말했다. 제대로 된 임상은커녕 임상에 쓸 의약품을 만들기도 어려운 금액이다.
한국 바이오벤처들도 한숨을 내쉬긴 마찬가지다. 자금난은 갈수록 심해지는데 체감하는 한국거래소의 상장 잣대는 더 높아져서다. “일본의 현실을 듣다 보니 한국이 일본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내 바이오산업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였지만 어느 누구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습니다.” 행사장에서 만난 한 바이오벤처 대표의 하소연이다. 바이오를 미래 먹거리로 키우려는 정부가 당장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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