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혁신’이 실종됐다는 한국은행의 분석이 나왔다. 미국 등 선진국 주요 기업들이 기초연구에 집중 투자해 선도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가운데, 한국 기업들은 공정을 개선하는 수준의 얕은 혁신에만 매달린 결과다. 2040년부터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국면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혁신을 통한 성장률 제고 노력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 부원장은 “한국 기업의 기술개발(R&D) 지출 규모는 세계 2위 수준이지만 특허 품질은 하위권”이라며 “혁신기업의 생산성 증가율이 2001~2010년 연평균 8.2%에서 2011~2020년 1.3%로 크게 둔화했다”고 지적했다.
연구자들은 혁신기업을 미국에서 특허를 출원한 기업으로 정의했다. 한국 혁신기업의 양적성과는 우수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국내총생산(GDP)의 4.1%를 R&D지출에 쓰고 있으며, 미국 내 특허 출원건수는 세계 4위에 해당한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투자에 나선 결과다.
문제는 혁신의 질이 크게 후퇴했다는 점이다. 우수한 특허의 기준인 특허당 피인용건수는 1.4건에 그친다. 미국(5.0건)과 네덜란드(3.7건), 스위스(2.8건) 등 주요국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이는 한국의 특허가 신기술 개발과는 별 관련이 없고, 기존에 있던 기술을 약간씩 개선해 공정을 좀 더 나아지게 만드는 정도에 그치기 때문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지적이다.
한은은 “응용연구는 혁신 실적의 양을 늘리는 데 효과적인 반면, 기초연구는 질과 관계가 깊다”며 “대기업은 기초연구 성과를 여러 산업에서 폭넓게 활용할 수 있는데도 지출비중이 줄고 있다”고 밝혔다.
혁신을 추구하는 중소기업이 줄어든 것도 생산성 증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한은은 자금조달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중소기업이 혁신을 추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고 봤다. 한국기업혁신조사 원시자료를 한은이 분석한 결과 중소기업 중 ‘내부자금 부족’을 혁신 저해요인으로 응답한 제조업 기업은 2007년 12.8%에서 2021년 77.6%로 많아졌다. 벤처캐피탈 입장에서도 인수합병(M&A)이나 기업공개(IPO) 시장이 활발하지 않아 투자를 꺼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혁신 창업가가 많이 나오지 않는 것도 혁신을 저해하는 요소로 파악됐다. 인지 능력이 뛰어나면서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똑똑한 이단아’ 성향의 학생들이 한국에선 창업 대신 취업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성향의 학생들은 미국에선 다수가 창업에 나선다. 차고에서 혁신기업 애플을 세운 스티브 잡스와 같은 선택을 한다. 반면 한국에선 이런 학생들이 대기업 등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은의 시나리오 분석 결과 기업의 기초연구에 대한 보조금 지급률을 현재의 3배 수준으로 높일 경우 경제성장률이 0.22%포인트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 후생은 2.1% 가량 개선됐다.
기업의 기초연구만 지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기초연구와 응용연구 모두에 대한 보조금 지급률을 1.5배 높이고, 대학 등 공공연구기관의 기초연구 직접 자금지원을 1.5배 늘리는 시나리오에서는 경제성장률이 0.18%포인트 높아지고, 사회후생은 1.3% 개선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혁신자금 공급 여건 개선도 혁신 증대를 통한 성장률 제고에 기여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자금 공급 확대를 위해 M&A 등 경영권 거래율을 2배 높이는 시나리오에선 성장률이 0.04%포인트 상승하고 후생이 0.6%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혁신 창업가를 육성하기 위해 교육환경을 개선해야한다는 지적도 내놨다. 실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깨기 위해 노동유연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조 부원장은 “특허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기초연구에 집중하고, 잠재력을 갖춘 신생기업의 진입을 유도해야한다”며 “혁신이 되살아나지 않으면 성장률이 0%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강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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