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경제신문과 한경닷컴은 매주 월요일 대치동 교육 현실의 일단을 들여다보는 '대치동 이야기'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아이가 대치동에서 적응하지 못해 '탈(脫)대치'하는 케이스도 많아요. 이런 얘기는 수면 위로 잘 드러나진 않아요. 같이 공부하다가 조용히 없어지는 친구들 보면 짐작만 하는 거죠."
40대 학부모 A씨는 최근 대치동을 떠나 종로구로 이사했다. 둘째 딸을 위해서다. 그 자신이 대치동 토박이인 A씨는 열심히 공부해 전문직 직장인이 됐다. 첫째 아들도 대치동에서 조기 유학 준비를 시켜 아이비리그 대학 합격증을 따냈다.
그에겐 나름대로 '대치동 성공 노하우'를 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둘째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어린이집부터 쉴 새 없이 달린 둘째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공부 못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다. 부모 몰래 등교하지 않아 학교에서 연락이 오는가 하면 체중 저하 등 부작용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학원을 줄이고 상담을 받아가며 대치동서 버텨보려 했으나, 결론은 대치동 탈출. 중학생이 된 A씨의 딸은 전학 후 모든 학원을 관두고 학교만 다니고 있다. A씨는 "오히려 벗어나니 속은 편하다"고 말했다.
명문대에 진학하기 위해 상상초월의 사교육에 의존하는 대치동 학부모들이 대치동 학습 방식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판단하는 척도는 학교다. 학업 스트레스를 겪는 학생들이 가장 많이 보이는 증상 중 하나가 '등교 거부'이기 때문이다.
송파구에서 중학교 내내 전교 톱 성적을 유지하며 전교 학생회장까지 지낸 학생이 대치동 유명 고교에 진학했다가 고2때부터 갑자기 등교를 거부하며 공부를 완전히 끊어 졸업을 못 한 사례도 있다. 대치동 학원가와 가까워 진입 수요가 많은 한 아파트 단지에서 서로 다른 가정의 학생과 부모가 우울증으로 연달아 ‘극단적 선택’을 한 게 쉬쉬하며 회자되기도 했다.
치열한 성적 경쟁으로 학업 스트레스를 겪는 학생들은 불안감과 우울감, 무기력 등을 겪는다. 문제는 "힘들고 아프다"고 말하는 것조차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기분이 든다는 점이다.
대치동에서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고 있는 40대 학부모 B씨는 "모든 집단이 비슷하겠지만, 대치동에서도 성공한 사례는 크게 조명되고, 실패한 사례는 철저히 숨겨진다"고 했다. 그는 "대치동에 학원만큼 많은 게 정신건강의학과, 청소년 상담 심리 센터"라고 덧붙였다.
대치동 입시 컨설턴트 C씨는 "강남을 중심으로 거리가 멀지 않은 대안학교들은 경쟁률은 수십 대 1 수준으로 높은 편"이라면서 "한 학급당 10명 정도로 운영되기 때문에 선생님이 학생당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길다는 점에서 부모들이 만족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학교 교육과정 외 사교육을 받지 않겠다는 각서나 부모 심층 면접을 보는 대안학교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해외대 진학을 고려하는 학부모라면 아이의 대치동 적응도와 무관하게 강남의 비인가 국제학교를 보내기도 한다"며 "아이가 내성적이라 일찍 수도권의 대안학교에 진학시켜 미국에서도 톱티어 속하는 뉴욕대 학부 경영학과에 합격시킨 사례도 있다"고 덧붙였다.
일부 대안학교와 비인가 국제학교들은 매달 드는 학비 외에도 500만~1000만원에 달하는 입학금 혹은 보증금을 내야 한다. 소수의 학생으로 운영되는 비인가 교육기관은 재정적 부담도 만만치 않은 데다 졸업 학력을 인정받기 위해 검정고시를 따로 봐야 한다.
최근 지역별 학부모의 교육법을 다루는 한 유튜브 영상에서 대치동 학부모가 "자녀가 5세에 영어 유치원을 다니다 6개월 만에 '번아웃(탈진)'을 겪었다. 아이가 방에 못 들어가고, 색연필을 못 잡아 서둘러 해당 유치원을 관뒀다"고 밝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대치동 잔류를 택한 학부모라도 요즘에는 '자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스트레스를 관리할 줄 아는 덕목'이 대치동 학부모로서의 필수 요건으로 여겨진다. 유치원생 시절부터 대학 입학 때가지 14년간 한 번도 번아웃을 겪지 않는 학생은 없다는 이유에서다.
가장 손 쉬운 스트레스 관리 방식은 '사교육 다이어트'다. 학원 개수를 줄이거나, 다니던 학원보다 숙제량이나 학업 분위기가 비교적 느슨한 편인 것으로 알려진 학원으로 옮기는 식이다. 대치동에서 교육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박은주 링고맘에듀 대표는 "사춘기 무렵 학원을 전부 관두거나 수학학원 1곳 정도로 확 줄이는 사례가 있다. 자녀에게 '쉼'을 주려는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박 대표는 이어 "사춘기가 임박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농구 교실, 수영장 등을 다니는 대치동 키즈도 매우 많다"고 덧붙였다.
한티역 인근엔 학업 스트레스를 겪는 청소년들을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마련한 청소년 심리상담 센터도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20대 대학생, 학부모까지 이곳을 찾는다. 전문 상담사가 상주해 놀이 치료와 심층 심리 상담을 진행한다. 상담이 모두 무료로 진행돼 대기 인원이 많다. 한명당 10회로 상담이 횟수 제한이 있다.
박은주 대표는 "대치 학원 인프라를 가깝게 활용할 수 있는 송파나 수도권 주요 학군지인 분당, 혹은 강북 지역으로 이사하려는 문의가 꾸준히 있다"면서 "특히 수학 과목에서 안정적으로 높은 성적을 유지하는 학생들의 경우에는 탈대치를 먼저 권하기도 한다"고 했다.
유명 영어강사 조정식 씨는 지난해 채널A의 한 교육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치동에 대해 "어떤 입시 전형을 준비시키느냐에 따라 그에 맞는 로드맵이 다르다. 선택과 집중을 할 필요가 있는데 대치동은 경쟁이 과열돼 '남들이 하면 우리 아이도'라는 분위기가 조성돼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서 "사교육을 시키더라도 학부모가 중심을 잘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정부의 사교육비 대책에도 사교육비는 매년 사상최대치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사교육을 받은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 사이의 격차도 심화하고 있습니다. 다들 사교육이 문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일까요. 한국경제신문·한경닷컴은 사교육으로 대표되는 대치동의 속살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는 '대치동 이야기' 시리즈를 기획해 매주 월요일 게재합니다. 대치동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스템을 모르면 한국 교육의 업그레이드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치동이 어디인지, 대치동의 왕좌는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학생, 학부모, 강사들의 삶은 어떤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대치동 이야기를 써 내려갑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거나 포털에서 [대치동 이야기]로 검색하면 더 많은 교육 기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김영리 한경닷컴 기자 smart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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