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사서와의 점심시간

입력 2024-05-29 17:55   수정 2024-05-30 00:08

청량리역 6번 출구를 빠져나오며 서울시 공공자전거 ‘따릉이’ 앱을 켠다. 근처 대여소에 따릉이가 7대나 남아 있다. 청량리역에서 동대문구답십리도서관까지는 자전거로 6분 거리다. 배차간격을 생각하면 버스보다 빠르다. 동대문구답십리도서관 상주 작가로 일하는 첫 달, 따릉이를 타고 왔다는 나에게 관장님은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이반 일리치의 책을 소개했다. 지구 환경을 이롭게 하는 목록을 말하면서였다.

“자전거는 당연하고요, 도서관이 그 목록에 들어가요. 그리고 또 하나는 시예요.” 따릉이를 타고 도서관에 출근한 시인에게 이보다 큰 환대의 말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세련된 방식으로 한 사람이 스스로를 사랑하게 만든다니. 나도 관장님이 자신의 모습을 흡족해할 만한 말을 해드리고 싶었는데 궁리하는 사이 도서관 점심시간이 끝나 버렸다.

정지돈 작가는 책 ‘영화와 시’에서 “점심시간은 밥을 먹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혼자 있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다. 직장 상사와 점심을 먹는 것이 일의 연장선이 되기도 하는 걸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다. 직장인의 점심시간에 대한 고찰이 가득한 글을 읽으며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점심시간만큼 짧은 시를 읽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했다. 멋진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어떤가. 정반대다. 이를테면 노원 더숲의 상주 작가가 된 김은지 시인과는 이런 대화를 나눴다.

“답십리도서관 좋아?” “응, 아주 좋아!”

“뭐가 좋은데?” “사서들이랑 점심을 같이 먹는대!”

은지 시인이 한바탕 웃었다. 도서관의 가장 큰 장점으로 ‘사서와의 점심시간’을 꼽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사실이다. 언젠가 혼자 밥을 먹다가 이상한 일에 휘말린 일이 있고 난 뒤로는 혼자서는 밥을 못 먹는 사람이 되었고 덕분에 위장병이 생겼다. 이전 직장에서는 다들 혼자만의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여서 홀로 된 나는 점심시간마다 가까이 사는 김은지 시인을 불러들였다.

얼마 전, 구례 동네 책방 ‘로파이’에 다녀왔다. 책방 툇마루에 앉아서 하늘을 드리운 앵두나무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시와 노래가 하늘처럼 흐르고 사위가 어두워 갈수록 밝아오는 얼굴들이 있었다. 엄마와 함께 온 아이는 앵두를 따 달라고 졸랐고 책방 주인은 가장 둥글고 예쁜 앵두를 따서 주었다. 아이의 앵두 같은 입술이 활짝 벌어지며 웃음이 번졌다.

앵두가 톡 톡 떨어지는 마당을 쓸면서 왜 떨어지기 전에 앵두를 따지 않는지 물으려는데, 참새 여럿이 내려와 떨어진 앵두에 입을 댔다. 점심시간에 모여 앉은 우리 도서관 사서들 같았다. 어제는 사서님이 집에서 싸 온 유부초밥 하나를 집어 내 밥 위에 올려 줬다. 이런 생각을 하면 혼자서도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진다.

앵두에 손을 대면 새 떼들이 날아올까? 새는 사람의 손 냄새를 금방 알아본다고 했는데. 새는 사람보다 냄새를 80배 잘 맡는다고 한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놀라운 것은 어디에나 있다. 머위도 쑥쑥 자라서 꽃대를 내밀고 있겠지. 조용미 시인은 시 ‘다른 장소’에서 머위 꽃봉오리를 말리면 기침약이 된다고 썼다. “다른 장소를 걸을 때마다/각각/다른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문장이 선물 같다. 아직 앵두에 대한 시를 쓰지 못했으니, 시부터 기다려야지.

구례에 와서 앵두를 한 움큼씩 따서 투투 씨를 뱉었으니, 앵두가 내 몸을 입고 나에 대한 시를 쓸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 점심시간이 되었다. 여기선 굶지 않으니,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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