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금융허브였던 홍콩, 이젠 中 변방도시로 전락"

입력 2024-06-02 18:52   수정 2024-06-10 16:33


“구글 번역기가 없으면 이제 홍콩을 다닐 수가 없어요.”

지난달 29일 홍콩의 한 식당에서 만난 이탈리아인 프란체스코 씨는 휴대폰에 깔린 구글 사진 번역 앱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과거 홍콩에 왔을 땐 메뉴판에 중국어와 영어가 동시에 표기돼 있었는데, 이제 중국어로만 적혀 있는 식당이 대부분”이라며 “구글 번역 앱이 없으면 음식 주문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홍콩이 국제도시로서의 위상을 잃어가고 있다. 중국화를 거치면서 영어를 접하기조차 어려워지고, 국가보안법 강화 등 권위주의가 대두하며 외국 투자자와 기업들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다. 홍콩이 중국 광둥성의 한 소도시로 전락하고 있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현실화된 홍콩 엑소더스
1980~1990년대 홍콩은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 도시로 손꼽혔다. 자유로운 외환 거래, 유연한 노동시장, 낮은 세율과 최소한의 규제는 전 세계 큰손들이 홍콩으로 몰려든 이유다. ‘중국인 동시에 중국이 아닌’ 매력적인 지위를 활용한 홍콩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세계 금융산업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하지만 홍콩 민주화 운동으로 위기를 느낀 중국 정부가 홍콩의 자유를 박탈하고 통제를 강화하면서 글로벌 금융 중심지 홍콩의 위상도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홍콩 사모펀드와 벤처캐피털의 자본 조달액은 102억달러에 그쳤다. 이는 2021년 533억달러의 자금을 유치한 것과 비교해 81% 줄어든 수치다. 자본시장이 냉각되면서 골드만삭스, JP모간, 씨티그룹 등 글로벌 금융기업도 홍콩 지사 인력을 연달아 감축하는 추세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금융업 인력 감축의 여파가 올해 홍콩 경제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중국 리스크가 커졌다고 판단한 글로벌 큰손들도 하나둘 홍콩을 외면하고 있다. 캐나다 최대 연금기금 운용사 중 하나인 온타리오 교사 연금이 홍콩 본부를 해체한 게 대표적이다. 미국의 공적연금인 연방공무원 저축계정을 감독하는 연방퇴직저축투자위원회도 올 들어 홍콩에 대한 익스포저(위험 노출액)를 줄이고 있다.

다국적 회사들도 같은 이유로 아시아 시장의 중심지를 홍콩에서 싱가포르로 옮기고 있다.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제너럴모터스, 다이슨 등 다국적 기업 4200곳이 싱가포르에 아시아 지역 본부를 새로 마련한 점이 이를 보여준다. 반면 홍콩에 진출한 미국 기업 수는 4년 연속 감소해 2022년 6월 기준 1258개로 쪼그라들었다. 2004년 이후 가장 적은 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홍콩의 매력이 줄면서) 점점 더 많은 기업이 중국 본토에 직접 진출하거나 홍콩의 금융·비즈니스 라이벌인 싱가포르에 아시아 허브를 설립하고 있다”고 전했다.
통제 강화하는 중국 정부
홍콩의 추락에는 중국 정부의 과도한 개입이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평가다. 중국은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빌미로 2020년 6월 홍콩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또 간접선거를 강화하는 선거제 개편을 통해 행정·입법부를 모두 친중파로 채웠다. 지난 3월부터는 반역·내란 등의 혐의에 대해 최고 종신형을 선고할 수 있는 ‘기본법 23조’를 시행했고, 지난달 30일 홍콩 법원은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기소된 민주화 운동가 47명 중 14명에게 국가 전복 혐의에 대한 유죄 판결을 내렸다. 현지에서는 “이제 홍콩은 끝났다”는 자조적 목소리가 확산하고 있다. 홍콩에 거주하는 한 한국인 사업가는 “중국 정부를 상대로 할 말은 하는 옛 홍콩의 분위기는 사라진 지 오래”라며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도시가 활력을 잃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중국 정부의 홍콩 여론 통제는 점점 더 촘촘해지고 있다. 인터넷 검열과 웹사이트 접속 차단 조치까지 강화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의 홍콩 주재 총영사 그레고리 메이는 3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홍콩이 인터넷 내 특정 콘텐츠를 제거하고 특정 웹사이트 접속을 차단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며 “홍콩의 자유를 단속하는 중국의 검열이 홍콩의 매력을 반감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메이 총영사는 “검열이 강화되면서 불안감을 느낀 미국 기업들은 홍콩 방문 시 버너폰(임시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광둥성의 한 도시가 된 홍콩
영어가 사라지는 홍콩의 현실도 홍콩의 쇠락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중국 정부가 홍콩이 국제도시로 거듭나기보다는 중국의 일부분으로 존재하길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외국 기업이 떠나고 있는 것과 달리 중국 본토 기업의 홍콩 진출은 오히려 늘고 있다. 경제·산업 분야에서도 중국 본토의 입김이 강해지다 보니 보통화 구사 능력의 중요성도 자연스럽게 커지고 있다는 평가다.

지난달 28~30일 홍콩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제와인박람회 ‘비넥스포 아시아’에 참가한 한 한국 와인 수입업체 대표는 “6년 전 방문한 백화점 내 식당을 이번에 다시 갔는데, 영어로 응대 가능한 직원이 거의 없어 난감했다”며 “주류 메뉴에서 프랑스·미국 와인은 줄어드는 대신 중국 와인과 고량주 등이 많아졌다”고 했다. 홍콩에 진출한 한 국내 금융회사 관계자는 “과거 홍콩은 하나의 독립국가처럼 기능했다면 지금은 광둥성의 한 소도시 수준으로 변모하고 있다”며 “외국인 기업과 투자자 입장에서는 홍콩에 대한 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베이징=이지훈 특파원/홍콩=이선아 기자 liz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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