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부품 기업의 개발 경쟁력을 높이는 핵심 변수는 ‘디지털 전환’이다. 특히 프로토타입(시제품)을 제작할 필요 없이 가상 공간에서 모의 실험(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는 ‘가상공학 플랫폼’이 주목받고 있다. 가상공학 플랫폼 활용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은 외국산이 대부분이고, 통합 시스템을 구축하는 업무도 중소·중견기업에는 쉽지 않다. 이런 국내 기업의 어려움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이 가상공학 플랫폼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중소·중견기업도 디지털 전환을 준비 중이지만 구축과 운영 비용을 부담스러워한다. 자동차 부품 제조 업체인 A기업은 신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총 8종을 활용하고 있다. 이런 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는 소재·부품 기업이 연구개발을 할 때 꼭 필요하다. 소프트웨어 중 외국산 제품은 개당 도입비가 5000만원 이상이고 연간 유지보수비도 3000만~4000만원에 이른다.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쓰는 데 5년간 2억5000만원이 들어가는 셈이다. 국내 기계류 부품 제조기업은 이런 엔지니어링 SW의 90%를 수입에 의존한다. A기업 관계자는 “영업이익이 수십억원에 그치는 중소기업이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제품”이라고 토로했다.
지원하는 기능이 대개 비슷한데도 가격이 낮은 다른 소프트웨어를 쓰는 게 쉽지 않다. 여러 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를 통합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도 어려운 작업이다. 제품을 납품받는 대기업은 품질과 기술 정확도 등을 이유로 협력사에 엄격한 기준을 요구한다.
이에 따라 한국기계연구원이 개발한 KIMM사이버랩에 주목하는 대기업이 나오고 있다. KIMM사이버랩은 구조 해석, 3D 설계 등 컴퓨터 기반 엔지니어링 시뮬레이션을 지원하는 소프트웨어다. LG전자는 몇 개월간 검토한 끝에 이 프로그램이 외국산 소프트웨어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LG전자와 한국기계연구원은 지난달 30일 경남 창원시 LG스마트파크에서 가상공학 플랫폼 활용·확산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한국기계연구원 관계자는 “KIMM사이버랩은 현재 고가인 외국산 SW 대비 95%에 달하는 정확도를 보인다”고 강조했다.
KIMM사이버랩은 가상공학 플랫폼 구축 사업의 지원을 받아 개발된 오픈소스 기반의 무료 프로그램이다. 외국산 소프트웨어 대신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연간 수십억원이 넘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LG전자 같은 대기업이 이런 프로그램을 채택하면 협력사인 소부장 중소기업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크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에 따르면 시뮬레이션을 활용한 기업들은 제품 개발에 드는 기간을 평균 3.7개월 단축했다. 개발 비용도 평균 3400만원가량 절감했다. 연구기관이 기업 실무자를 대상으로 한 소프트웨어 활용 교육에 현재까지 총 4900명이 참여했다.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장은 “기업이 디지털 전환을 하려면 양질의 빅데이터, AI 전문가, 관련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등을 골고루 갖추고 있어야 하지만 규모가 영세해 어려움을 겪는 국내 소부장 기업이 많다”며 “한국기계연구원과 LG전자의 성공적인 협력 사례가 구축되면 다른 국내 기업도 관련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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