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만 기다렸다…'세계 최초 개발' 中 잡을 비장의 무기 [박동휘의 산업 인사이트]

입력 2024-06-04 09:41   수정 2024-06-05 11:26


배터리에 관한 얘기 중 우리가 잘 몰랐던 ‘스토리’가 하나 있다. 전기차용 리튬이온배터리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나라는 미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다. 엄연한 진실인 데도 내막을 자세히 아는 이들은 드물다. 늘 ‘빠른 추격자’에 만족해야했던 터라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설원 위의 첫걸음’을 내딛고도 그 진가를 스스로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구본무의 선견지명
‘배터리 기술 원천국’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 지는 한국을 먹여 살리는 15대 수출 품목만 봐도 알 수 있다. 반도체, 석유제품, 석유화학, 자동차 및 부품, 기계, 철강, 디스플레이, OLED, 선박, 휴대폰, 바이오헬스, 컴퓨터, 섬유, 가전 등 배터리를 제외한 14개 품목의 원천 기술은 미국 등 해외 선진국에서 개발됐다.


한국 산업사(史) 최초이자, 앞으로도 재현되기 힘든 이런 업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연원을 알려면 출발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최초 스토리의 주인공은 고(故) 구본무 LG그룹 선대회장과 김명환 전 LG화학 배터리연구소장(사장)이다.

LG화학 과장으로 그룹에 입사한 구 회장은 배터리를 자동차의 주 동력원으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실제 실천에 옮겼다. 1992년 영국 출장길이 계기가 됐다. 당시 부회장이던 구 회장은 한번 쓰고 버리는 건전지가 아니라 충전을 하면 여러 번 반복해서 사용이 가능한 2차전지를 접하고 새로운 성장 사업이 될 가능성을 직감하고는 귀국길에 샘플을 챙겨왔다.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건 1995년 LG화학에 배터리연구소를 설립하면서부터다. 연구소를 이끌던 김 소장은 당시 엄청난 ‘행운’을 발견했다. ‘납축 전지’로 불리는 전자 기기용 배터리의 강자인 파나소닉 등 일본 기업들이 관련 특허를 일본 내에만 출원했던 것이다.
일본의 실축, 미국의 빠른 포기
당시 일본은 2차전지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었다. 화학회사인 아사히카세이 출신의 요시노 아키라 박사가 리튬이온 배터리의 음극재를 완성함으로써 리튬이온 배터리의 상용화에 성공했다. 이때가 1985년이다. 이 공로로 요시노 박사는 2019년 노벨화학상 공동 수상자 3명 중 한명에 선정됐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리튬이온 배터리를 자동차에 탑재할 수 있다는 발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배터리에 관한 한 초격차를 달성했다는 자신감은 해외에 특허를 출원해야한다는 생각 자체를 막았다. 지나친 자신감이 독이 된 셈이다. GM의 실패도 호재로 작용했다. GM은 1996년 납축전지를 탑재한 최초의 전기차 ‘EV1’을 내놨지만, 시장 창출에 실패하고 2002년 전기차 상용화 계획을 백지화했다.

기술 강국이 머뭇거리는 사이, 구 회장의 선견지명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저마다 새천년 비전을 발표하던 2000년, 구 회장은 전기차용 배터리가 향후 LG그룹의 핵심 미래 사업이 될 것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2년 뒤인 2002년 콜로라도 스프링스 파인픽스에서 열린 레이싱카 대회에서 리튬이온 배터리를 장착한 차량을 출전시켜 1997년 도요타 니켈MH 전지를 탑재한 프리우스의 종전 기록을 갈아치웠다.
특허 전략 공세로 전환한 LG에너지솔루션
현재 전기차 배터리에 관한 특허는 약 100만건으로 추정된다. 이 중 LG에너지솔루션이 보유한 특허는 소재, 셀, 팩, 배터리관리시스템(BMS), 공정 등 분야에서 5만8000건에 달한다. LG엔솔의 ‘특허 지뢰’를 밟지 않고선 전기차용 배터리를 만들기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휴대폰을 판매하는 삼성전자가 퀄컴에 특허료를 연간 수천억원씩 지불하는 것과 같은 일을 앞으로 LG엔솔이 누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LG엔솔이 이 같은 ‘대규모 특허 포트폴리오’의 힘을 사용하지 않은 건 산업 활성화와 시장 확대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랬던 LG엔솔이 그 힘을 활용해 시장 정화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공급 과잉에 따른 공멸을 막기 위해서다. 한국 기업이 글로벌 시장의 규율을 만드는데 선두에 설 수 있다니 감개무량한 일이다. 선견지명과 뚝심으로 묵묵히 사업보국을 실천한 기업인의 힘이 이렇게 크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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