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에 관한 얘기 중 우리가 잘 몰랐던 ‘스토리’가 하나 있다. 전기차용 리튬이온배터리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나라는 미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다. 엄연한 진실인 데도 내막을 자세히 아는 이들은 드물다. 늘 ‘빠른 추격자’에 만족해야했던 터라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설원 위의 첫걸음’을 내딛고도 그 진가를 스스로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산업사(史) 최초이자, 앞으로도 재현되기 힘든 이런 업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연원을 알려면 출발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최초 스토리의 주인공은 고(故) 구본무 LG그룹 선대회장과 김명환 전 LG화학 배터리연구소장(사장)이다.
LG화학 과장으로 그룹에 입사한 구 회장은 배터리를 자동차의 주 동력원으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실제 실천에 옮겼다. 1992년 영국 출장길이 계기가 됐다. 당시 부회장이던 구 회장은 한번 쓰고 버리는 건전지가 아니라 충전을 하면 여러 번 반복해서 사용이 가능한 2차전지를 접하고 새로운 성장 사업이 될 가능성을 직감하고는 귀국길에 샘플을 챙겨왔다.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건 1995년 LG화학에 배터리연구소를 설립하면서부터다. 연구소를 이끌던 김 소장은 당시 엄청난 ‘행운’을 발견했다. ‘납축 전지’로 불리는 전자 기기용 배터리의 강자인 파나소닉 등 일본 기업들이 관련 특허를 일본 내에만 출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리튬이온 배터리를 자동차에 탑재할 수 있다는 발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배터리에 관한 한 초격차를 달성했다는 자신감은 해외에 특허를 출원해야한다는 생각 자체를 막았다. 지나친 자신감이 독이 된 셈이다. GM의 실패도 호재로 작용했다. GM은 1996년 납축전지를 탑재한 최초의 전기차 ‘EV1’을 내놨지만, 시장 창출에 실패하고 2002년 전기차 상용화 계획을 백지화했다.
기술 강국이 머뭇거리는 사이, 구 회장의 선견지명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저마다 새천년 비전을 발표하던 2000년, 구 회장은 전기차용 배터리가 향후 LG그룹의 핵심 미래 사업이 될 것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2년 뒤인 2002년 콜로라도 스프링스 파인픽스에서 열린 레이싱카 대회에서 리튬이온 배터리를 장착한 차량을 출전시켜 1997년 도요타 니켈MH 전지를 탑재한 프리우스의 종전 기록을 갈아치웠다.
LG엔솔이 이 같은 ‘대규모 특허 포트폴리오’의 힘을 사용하지 않은 건 산업 활성화와 시장 확대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랬던 LG엔솔이 그 힘을 활용해 시장 정화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공급 과잉에 따른 공멸을 막기 위해서다. 한국 기업이 글로벌 시장의 규율을 만드는데 선두에 설 수 있다니 감개무량한 일이다. 선견지명과 뚝심으로 묵묵히 사업보국을 실천한 기업인의 힘이 이렇게 크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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