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현장에 여러 노조가 설립돼 있는 한 대기업 대표는 4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소수 노조 때문에 사무실을 따로 임차해야 할 판”이라며 이처럼 하소연했다. 노조 사무실을 두고 제조 현장에서 불만과 혼란이 가중되는 것은 “소수 노조에도 사무실을 내줘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잇따르고 있어서다.
이달 초 서울행정법원은 인천 시내버스 운송업체가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상대로 낸 ‘공정대표의무위반 시정 재심판정 취소 소송’을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3개 노조가 활동하고 있는 이 회사는 그동안 135명인 한국노총 소속 A노조가 교섭대표로 회사와 단체교섭을 진행해 왔다. 이에 대해 조합원이 6명인 B노조가 사용자가 A노조에만 사무실을 제공한 게 ‘공정대표의무’ 위반이라며 노동위원회에 시정 신청을 냈다.
2010년 개정 노동조합법에 따르면 복수 노조 사업장에서는 노조끼리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를 거쳐 대표 노조를 정해야 한다. 노조와 사용자 간 분쟁이 일어나는 건 불명확한 법조항 때문이다. 노동조합법은 원활한 창구 단일화 등을 위해 교섭 창구를 단일화하면서 사업주와 교섭대표 노조에 ‘소수 노조를 차별하지 않을 의무’(공정대표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공정대표의무의 구체적인 내용이 법에 명시돼 있지 않다.
인천 시내버스 운송업체는 재판 과정에서 B 노조는 조합원이 6명에 그치고 활동이 적다는 점을 강조하며 “모든 노조에 편의(사무실)를 제공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사무실은 노조 존립과 발전에 핵심적 요소”라며 “차별의 합리적 이유가 안 된다”고 지적했다. 회사는 “A노조 사무실도 차고지 안에 컨테이너를 준 것”이라며 공간이 많지 않다고 하소연했지만, 법원은 “A노조 사무실 일부를 공유해주는 방법도 있다”고 판결했다.
개별 노조에 사무실을 제공하라는 취지의 이런 법원 판결은 늘고 있다. 올해 초에도 서울행정법원은 444명 규모의 교섭대표 노조에만 사무실을 주고 5명짜리 소수 노조에 사무실을 내주지 않은 것이 공정대표의무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한 자동차 부품업체의 인사담당 부사장은 “교섭대표 노조와 소수 노조가 서로 반목하고 있는 사업장에선 사무실 유무가 자존심 문제로 여겨지면서 사업주들만 들볶이고 있다”고 전했다.
법원은 모호한 법 규정을 적용할 때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하고 있는 기업의 현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지방노동위와 중앙노동위 간 판정도 엇갈릴 정도로 불명확한 공정대표의무의 기준부터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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