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화장지가 국산 둔갑…제지업계, 印尼 업체 고발

입력 2024-06-05 18:32   수정 2024-06-13 16:30


외국산 공세에 시달려온 국내 화장지 원단업계가 5일 인도네시아 제지회사인 아시아펄프앤페이퍼(APP)를 대외무역법(원산지 표시) 위반 혐의로 관세청에 고발하기로 했다. 한국의 원산지표시제 허점을 이용해 위생용지 시장을 잠식해온 해외 업체에 대한 첫 법적 대응이다.

제지업계에 따르면 대왕페이퍼, 대원제지, 삼정펄프 등 6개 화장지 원단 제조사는 APP의 한국법인인 그랜드유니버셜트레이딩코리아(GUTK)를 고발하기로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하는 화장지 원단이 국내에 들어온 뒤 절삭·지관(심지) 삽입 등 간단한 가공 과정만 거쳐 ‘대한민국산’으로 둔갑해 버젓이 팔리는 데 대해 국내 업계는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다.

국내 화장지 원산지 표기는 가공제조원만 표시한다. 원단이 국내에서 생산됐든, 해외에서 생산됐든 가공만 국내에서 이뤄지면 국내산이 된다는 얘기다. 업계 관계자는 “까다로운 환경 규정을 거쳐 생산하는 국산 화장지 원단과 달리 외국산은 이 과정이 생략된 채 국산보다 20% 싼 가격에 수입된다”며 “소비자를 속이고 국내 시장 질서를 교란하고 있어 고발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APP는 인도네시아 대기업 시나르마스의 제지·펄프 계열사로 글로벌 10위권 회사다. 지난해 국내 화장지 원단 수입 물량(15만t) 중 73%(11만t)가 APP 생산품이다. 지난 4일 국내 화장지 업체 모나리자와 쌍용C&B(코디)를 동시에 인수하며 거침없이 한국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눈물 젖은 화장지…"가짜 국산에 기계 돌릴수록 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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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지역의 한 화장지 원단 제조 업체는 요즘 한 달에 절반 가까이 기계를 멈춰 세운다. 2년 전만 해도 명절 연휴를 빼곤 24시간 생산하던 곳이다. 지난해에는 한 달에 열흘 정도만 가동을 중단했지만 올해부터 재고가 점점 쌓이면서 상황이 더 악화됐다.

화장지 원단 제조 설비는 몸집이 커 한 번 멈췄다가 재가동하려면 수억원의 비용이 든다. 하지만 저가 인도네시아·중국산이 ‘반(半)제품’ 형태로 국내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뾰족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화장지 가공업체는 외국산 원단을 받아도 ‘대한민국산’으로 표시해 판매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더 비싼 국내 원단을 쓸 이유가 없다. 생존 갈림길에 몰린 화장지 원단업계가 인도네시아 제지회사인 아시아펄프앤페이퍼(APP)를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선 배경이다.
○원산지 표시 허점에 수입량 폭증
국내 화장지업계는 원단 제조사와 가공 업체로 나뉜다. 펄프를 직접 들여와 화장지 원단을 만드는 기업은 국내 11곳뿐이다. 화학 처리 등 엄격한 국내 규정에 맞춰 생산한다. 하지만 가공 업체는 원단을 어디서든 받은 뒤 규격에 맞게 자르고 지관(심지)을 넣어 완제품을 생산하는 비교적 쉬운 공정이어서 국내 200여 개 회사가 난립해 있다.

국산·외국산 원단으로 만든 화장지가 모두 ‘대한민국산’으로 팔리는 것은 부실한 원산지 표시제 탓이다. 국내 화장지 원산지 표기는 가공제조원만 표시하도록 규정돼 있다. 이 허점을 노리고 인도네시아 APP 등은 국내 제지 가공업체에 약 20% 낮은 가격으로 공급해 시장 점유율을 높여왔다. 국내 위생 용지 시장 규모는 약 60만t이다. 2022년 약 10만9000t이던 수입 규모가 지난해 약 15만4000t으로 40% 이상 뛰었다. APP 한국법인은 2020년부터 적자를 보면서도 원단 공급은 꾸준히 늘렸다.
○시장·가격 주도권 노리는 APP
지난 4일 APP가 국내 화장지 원단 제조사인 모나리자, 쌍용C&B(코디) 동시 인수를 발표하자 제지업계에선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APP가 그동안 원단을 국내에 수출한 것에 그쳤는데, 이젠 국내 기업을 인수해 시장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모나리자와 쌍용C&B는 원단 제조뿐 아니라 가공 설비를 동시에 갖춘 회사다. 모나리자와 쌍용C&B의 생산능력을 합치면 연간 13만t에 이른다. 이는 유한킴벌리에 이은 국내 위생 용지 업계 2위 규모다. APP가 화장지 완제품을 직접 생산하면 원단을 받아 가공해 팔던 가공업계도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APP로선 펄프부터 원단 생산에 이어 마무리 가공까지 수직계열화를 이뤄낸 것이어서 현재보다 더 낮은 가격에 화장지를 판매할 수 있다.
○‘나 몰라라’ 손놓은 정부
화장지는 국민 건강과 밀접한 생활용품인데 정부가 안일하게 대응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화장지는 다른 용지와 달리 산업통상자원부뿐 아니라 식품의약품안전처와 산림청까지 엮여 있다. 제지업계는 지난해부터 원산지 문제와 외산 원단의 안전성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국내 원단 제조사가 줄도산하면 대만처럼 화장지 품귀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김형진 국민대 임산생명공학과 교수는 “대만은 값싼 중국산 화장지 원단에 시장이 잠식당해 현지 제조사들이 고사했다”며 “몇 년 뒤 한국도 똑같은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고 말했다.

최형창 기자 call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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