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산 공세에 시달려온 국내 화장지 원단업계가 5일 인도네시아 제지회사인 아시아펄프앤페이퍼(APP)를 대외무역법(원산지 표시) 위반 혐의로 관세청에 고발하기로 했다. 한국의 원산지표시제 허점을 이용해 위생용지 시장을 잠식해온 해외 업체에 대한 첫 법적 대응이다.
제지업계에 따르면 대왕페이퍼, 대원제지, 삼정펄프 등 6개 화장지 원단 제조사는 APP의 한국법인인 그랜드유니버셜트레이딩코리아(GUTK)를 고발하기로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하는 화장지 원단이 국내에 들어온 뒤 절삭·지관(심지) 삽입 등 간단한 가공 과정만 거쳐 ‘대한민국산’으로 둔갑해 버젓이 팔리는 데 대해 국내 업계는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다.
국내 화장지 원산지 표기는 가공제조원만 표시한다. 원단이 국내에서 생산됐든, 해외에서 생산됐든 가공만 국내에서 이뤄지면 국내산이 된다는 얘기다. 업계 관계자는 “까다로운 환경 규정을 거쳐 생산하는 국산 화장지 원단과 달리 외국산은 이 과정이 생략된 채 국산보다 20% 싼 가격에 수입된다”며 “소비자를 속이고 국내 시장 질서를 교란하고 있어 고발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APP는 인도네시아 대기업 시나르마스의 제지·펄프 계열사로 글로벌 10위권 회사다. 지난해 국내 화장지 원단 수입 물량(15만t) 중 73%(11만t)가 APP 생산품이다. 지난 4일 국내 화장지 업체 모나리자와 쌍용C&B(코디)를 동시에 인수하며 거침없이 한국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작년 수입량 40% 폭증에 일감 뚝…줄도산 내몰렸는데 정부는 '뒷짐'
화장지 원단 제조 설비는 몸집이 커 한 번 멈췄다가 재가동하려면 수억원의 비용이 든다. 하지만 저가 인도네시아·중국산이 ‘반(半)제품’ 형태로 국내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뾰족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화장지 가공업체는 외국산 원단을 받아도 ‘대한민국산’으로 표시해 판매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더 비싼 국내 원단을 쓸 이유가 없다. 생존 갈림길에 몰린 화장지 원단업계가 인도네시아 제지회사인 아시아펄프앤페이퍼(APP)를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선 배경이다.
국산·외국산 원단으로 만든 화장지가 모두 ‘대한민국산’으로 팔리는 것은 부실한 원산지 표시제 탓이다. 국내 화장지 원산지 표기는 가공제조원만 표시하도록 규정돼 있다. 이 허점을 노리고 인도네시아 APP 등은 국내 제지 가공업체에 약 20% 낮은 가격으로 공급해 시장 점유율을 높여왔다. 국내 위생 용지 시장 규모는 약 60만t이다. 2022년 약 10만9000t이던 수입 규모가 지난해 약 15만4000t으로 40% 이상 뛰었다. APP 한국법인은 2020년부터 적자를 보면서도 원단 공급은 꾸준히 늘렸다.
모나리자와 쌍용C&B는 원단 제조뿐 아니라 가공 설비를 동시에 갖춘 회사다. 모나리자와 쌍용C&B의 생산능력을 합치면 연간 13만t에 이른다. 이는 유한킴벌리에 이은 국내 위생 용지 업계 2위 규모다. APP가 화장지 완제품을 직접 생산하면 원단을 받아 가공해 팔던 가공업계도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APP로선 펄프부터 원단 생산에 이어 마무리 가공까지 수직계열화를 이뤄낸 것이어서 현재보다 더 낮은 가격에 화장지를 판매할 수 있다.
국내 원단 제조사가 줄도산하면 대만처럼 화장지 품귀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김형진 국민대 임산생명공학과 교수는 “대만은 값싼 중국산 화장지 원단에 시장이 잠식당해 현지 제조사들이 고사했다”며 “몇 년 뒤 한국도 똑같은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고 말했다.
최형창 기자 calling@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