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층 상대의 전세사기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가 됐다. 임대자가 세입자를 상대로 작정하고 보증금 사기를 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집값이 급등락하는 와중에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해 빚어지는 딱한 사정도 적지 않다. 비주거용 건물을 주택으로 편법 개조했거나 인기가 적은 값싼 주택 등에서 빚어지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든 전세사기의 희생자는 경제적 취약층이 많다. 결국 전세사기 피해자에 대해 정부가 ‘선(先)구제, 후(後) 회수’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런 여론을 수용해 제21대 국회가 폐막 직전에 전세사기특별법까지 제정하려 했으나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됐다. 그럴 경우 다른 모든 사기 피해를 정부가 다 보상해줄 것이냐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도 주거 안정 등의 이유로선 구제 법제화 요구는 계속된다. 타당한 주장인가.
결국 전세사기는 임대인과 임차인의 개인적 문제로만 국한해서 보기는 어렵다. 사회적 문제, 나아가 사회 병리적 증세라고 보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많은 청년이 전 재산의 전세금을 떼이면서 삶의 막다른 골목으로 밀리게 된 데에는 ‘정부의 실패’나 ‘시장의 실패’라는 측면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가령 임대인이 개인으로 빌라나 오피스텔 등을 수백 채 보유하고 임대업에 나섰다가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경우를 상정해보자. 이 많은 집을 담보로 금융회사에서도 돈을 빌려서 안 갚거나 못 갚는 상황에서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다면 금융감독 당국은 그간 무엇을 했는가. 금융회사 대출 건전성 감독 차원에서 이런 기형적 대출을 예방하거나 바로 대처해야 할 책무가 있지 않은가. 일종의 정부 및 시장의 실패로 볼 수 있고, 그에 따른 책임 차원에서 나랏돈을 동원해서라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해결하라는 것이다.
비용이 많이 들고 적게 들고의 문제가 아니다.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선구제에 5조원(2024년 5월 말 현재)의 비용이 소요된다고 추정하지만, 피해자 단체에서는 5000억원으로 풀 수 있다고 한다.
정부는 시장 안정을 명목으로 기업에 막대한 금융 지원도 한다. 부동산 안정을 위해 건설회사의 부실 PF(프로젝트 파이낸싱, 부동산 금융)에 지원하면서 개인들의 주거 고충은 왜 해결하지 못하나.
직접 예산 동원이 어려워지자 야당에서는 사기 피해자의 보증금을 ‘주택도시기금’을 활용해 우선 돌려준 뒤 추후 집주인에게서 돈을 돌려받자고 하지만 이 또한 문제가 많다. 주택도시기금은 무주택 서민의 청약저축으로 조성된다. 전세사기 피해자를 돕기 위해 집도 없는 서민이 맡긴 자금을 쓰자는 게 말이 되나. 더구나 이 기금은 2021년 49조원에서 2024년 3월 13조9000억원으로 줄어들어 여유도 없다. 기금이 고갈되면 공공주택 공급 등 주거복지 사업에 차질이 생긴다. 선구제로 정부가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먼저 지급한 돈을 나중에 집주인에게 돌려받을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눈먼 돈처럼 되면서 회수가 어려워질 것이고, 부족분은 ‘부실채권’이 될 수밖에 없다.
건설회사 등에 대한 부동산 PF 대책도 직접적 현금 지원은 없다. 부실기업에 대한 공적자금 지원은 대개 대주주의 개인 재산을 담보로 잡거나 경영권을 포기하게 하는 조건으로 행해진다. 특정 계층이나 개인·기업들을 위한 일방적인 현금성 지원은 ‘국가부도 사태’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안 되는 것이다. 야권의 선구제 주장은 표심을 노린 포퓰리즘에서 비롯됐다. 정책 결과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수석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