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물가 급등에 특약 무효"…공사비 갈등 새 분수령

입력 2024-06-11 18:29   수정 2024-06-12 01:31


최근 공사비 분쟁의 핵심은 예상치 못한 건설자재 가격 급등 부담을 건설사가 전적으로 떠안는 것이 불공정한지 여부다. 시공사 측은 예상치 못한 원자재값 폭등 상황에서 추가 공사비를 요구할 수 없도록 한 ‘물가변동 배제특약’은 불공정한 약정으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재건축·재개발조합, 민간 기업 등 발주처는 계약 준수의 원칙에 따라 특약의 효력을 주장하며 양측이 곳곳에서 갈등을 빚고 있다.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물가 급등이라는 ‘특수 상황’을 고려해 특약을 무효로 보는 판결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전문가들은 특약 효력을 제한하려는 다른 회사들의 소송이 급증할 것으로 내다봤다.
특약 무효 인정한 판결 잇따라
11일 법조계와 건설업계에 따르면 ‘e편한세상 부평그랑힐스’가 들어선 인천 부평구 청천2구역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의 공사비 분쟁 소송이 지난달 31일 시공사 DL이앤씨 측의 소 취하로 일단락됐다. DL이앤씨는 물가 상승으로 공사비가 20% 증가했다며 1645억원의 추가 공사비를 요구했지만, 재개발조합과 무궁화신탁 등 발주처 측은 ‘2020년 8월 이후 물가 상승에 의한 공사비 조정은 없다’는 특약을 근거로 거부했다. 소송전으로 치닫던 갈등은 양측이 공사비 일부 증액에 최종 합의하면서 마무리됐다.

관련 업계는 이번 합의 직전 물가 배제특약을 무효로 본 법원 판결이 나온 점에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대법원은 민간 도급계약상 물가 배제특약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계약 해지 요건도 엄격하게 제시했다. 그러나 최근 부산고등법원은 ‘계약 내용이 당사자 일방에게 현저하게 불공정한 경우에 특약을 무효로 할 수 있다’고 규정한 건설산업기본법 제22조 제5항을 근거로 특약 효력을 제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지난 4월 대법원에서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로 확정됐다.

법원 판결과 비슷한 효력을 지니는 중재 판정에서도 물가 배제특약을 무효로 본 결정이 나왔다. 대한상사중재원은 한국중부발전과 한 중공업 기업 간 탈황설비 구매계약 중재 사건에서 이 특약을 무효로 보고, 시공사가 청구한 추가 계약금액의 상당 부분을 지급하라고 판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공공기관의 도급계약에서 물가 배제특약을 무효로 본 기존 판례는 있었지만, 설비 구매계약에서도 특약이 무효로 판단돼 주목된다.

법무법인 율촌의 이경준 변호사는 “최근 나온 물가 배제특약 무효 판결은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원자재값 급등이라는 특별한 상황이 고려된 것”이라며 “건설산업기본법을 근거로 특약을 제한하려는 소송이 당분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불공정 거래” vs “계약 준수해야”
하급심에 계류 중인 공사비 청구 소송 사건에서도 물가 배제특약과 건설산업기본법 조항이 중요한 판단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KT 경기 판교사옥 건설 공사비 증액을 두고 다투던 KT와 쌍용건설도 결국 법정행을 선택했다. 쌍용건설이 원자재 가격 상승 등의 이유로 171억원의 추가 공사비를 요구하자 KT는 지난달 10일 공사비를 모두 지급했다며 ‘채무부존재확인의 소’를 제기했다. KT 관계자는 “회사 경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인 만큼 명확한 해결을 위해 법적 판단을 받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건설업계의 공사비 분쟁은 특약과 건설산업기본법 해석을 둘러싸고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법무법인 지평의 정원 변호사는 “KT그룹은 현대건설, 롯데건설, 한신공영 등과도 물가 배제특약이 담긴 도급계약을 체결한 만큼 이번 쌍용건설과의 소송전이 다른 회사의 특약 유효성을 따지는 중요한 판결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물가변동 배제특약

시공사가 착공 후 물가 변동에 따른 추가 공사비를 요구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도급계약서상 특약. 코로나19 이후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공사비가 급증하면서 이 특약의 유효성을 다투는 소송이 늘고 있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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