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 전문 배우→무속인…"파묘, 내가 했다면 더 리얼" [이일내일]

입력 2024-06-13 06:27   수정 2024-06-13 08:32



눈빛만 봐도 무섭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얼마나 살벌하게 연기를 했는지 그가 길을 걸어가면,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정호근은 배우였던 모습보다 신당에서 한복을 입고, 인자한 미소로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모습이 더 익숙해졌다.

2013년 10월 신내림을 받았다는 정호근은 올해로 무속인이 된 지 10년이 됐다. 최근엔 영화 '파묘', '천박사 퇴마 연구소:설경의 비밀' 등의 작품에서 무속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무속인들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도 손쉽게 볼 수 있을 만큼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가 신내림을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무당, 무격(남성 무속인)이라고 하면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라고.

"할머니가 만신이었다"는 정호근은 "알고 보니 대를 이어온 무당 집안이었다"면서 신을 모시는 운명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촬영장에서 갑자기 뭐가 보이고, 소리가 들리니 대사를 날려버릴 정도였다"며 "신을 어떻게 이기겠나. 무당이 될 팔자는 무당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다"면서 웃었다.

현재 유튜브 채널 '정호근쌤의 인생신당'을 운영 중이기도 한 정호근은 미디어에서 그려진 무속인의 모습이 아닌 상담가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굿을 할 때 "나도 작두를 탄다"는 정호근이지만 "(신당에선) 저는 일상의 언어로 얘기를 하는데, 전국의 무속인 투어를 하는 사람 중엔 그런 모습을 보며 '싱겁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라"며 "온화하고 평범한 말속에 딱 맞아떨어지는 말이 있어서 저를 찾았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속인에 대한 편견, 잘못된 인식을 조금이라도 바로잡아보자는 의도로 유튜브도 시작했다"며 "앞으로도 저 할아버지, 형님에게 가면 해결책을 받고, 마음의 위로를 받아 치유와 기운을 얻었다는 말을 듣는 '만신'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무속인이 된 정호근입니다.

▲ 요즘은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신내림을 받은 후 이를 공개하고 무속인으로 활동하고 계세요.

당당하고 싶었어요. 무속인이라고 하면 손가락질받는 직업인데, 왜 그래야 하나 싶었죠. 사람들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예전의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행동, 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들에게 손가락질받지 않는, 격이 있고 존경받는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 일을 가야 한다는 결정을 짓고도 집에서 쉬쉬하는 분들도 많아요. 그런데 전 그렇게 할 바엔 신을 받고, 무속인이 됐다는 얘길 하지 말아야 한다고 봐요. 움츠러들면 점사도 더 안 나옵니다. 누구에게나 당당하고, 누구에게나 거침이 없어야 점사입니다. 그래야 상담도 할 수 있고요.

▲ 과거 '정도전', '굿닥터', '뉴하트' 등에서 연기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살벌하고 무서웠는데, '인생신당'을 보면 너무 인자한 모습이시더라고요.

그게 원래 제 모습이에요. 나쁜 놈 연기를 잘한다고 자꾸 더 나쁜 놈 역할을 시키더라고요. (웃음) 악랄하고, 비열하고, 사악한 건 다 왔는데, 저라고 하고 싶었을까요. '못하겠다'고 했어요. '사람들이 나한테 돌까지 던진다'고요. 지금 생각하면 신이 들린 사람이라 그렇게 당돌하게 말할 수 있었던 거 같은데, ('허준', '상도', '대장금' 등을 연출한) 이병훈 국장이 '네가 잘해서 그런 거야'라고 하시면서 가시더라고요. 그땐 배우로서 한계성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죠.

▲ 말투나 경청하는 모습이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무속인의 모습과도 달라 보였어요.

저는 말하듯이 해요. 일상의 언어로 하죠. 그런데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눈을 제대로 안 뜬다든지, 고개를 흔들고, 호통을 치면서 놀라게 한다든지. 전국에 무당 투어를 도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이 저를 보고서 '싱겁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더라고요. 전 놀라게 안 하니까요. 하지만 인연이 되는 사람들은 온화하고 평범한 말속에서 귀신같이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면서 계속 찾아오시더라고요.

▲ 최근엔 MBTI처럼 사주를 보는 사람도 늘어나긴 했지만, 사주를 보는 것과 점을 보는 건 다른 영역이잖아요.

명리학과 역술은 학문이에요. 공부하고, 끊임없이 파고들어야 하죠. 무속은 강신무와 세습무로 나뉘는데, 세습무는 굿과 같은 퍼포먼스를 집안 대대로 하는 거예요. 작두도 타고, 돼지도 잡고, 제의 의식을 답습하죠. 강신무는 저와 같이 어느 날 뭔가가 보이고, 무슨 말을 하게 되고 그렇게 몸으로 신을 모시는 형태에요. 갑자기 몸이 아프고, 다른 사람과 같이 밥을 먹다가 돌연 '할머니가 편찮으시냐? 곧 돌아가시겠네' 이런 말을 하는데, 보통 사람들이 보기엔 '돌았나' 이런 취급을 당할 말과 행동을 하는 거죠.

▲ 강신무는 어떤 사람이 되는 건가요?

이것도 집안 내력이 강하긴 해요. 집안에 무속인이 있으면 자손도 무속인이 나오는 거죠. 저도 할머니가 만신이셨지만, 하늘과 신, 조상을 위하는 기도를 해보니 그 위에서부터 무당 밭이더라고요.(웃음) 어느 날 느닷없이 신이 저에게 오신 거예요.

▲ 혹자들은 무속인과 연예인의 운명이 비슷하다고 하더라고요. '신기(神技)가 있다'는 말이 '끼가 있다'는 의미의 칭찬으로 쓰이기도 하고요.

연기라는 게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신기가 있는 걸 재능, 끼가 있다고 하기도 해요. 하지만 전 그보다 더한 거죠. 기운이 솟구쳐 오르는 거예요. 연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다른 사람의 얼굴이 보이고, 눈을 보며 교감하는데 이면이 보이는 식이죠. 이게 달라요. 이런 사람들은 (무속인의) 방울을 흔드는 거죠. 촬영하다가 상대방 얼굴을 보는데 자꾸 교통사고가 나는 장면이 보이고 '쾅'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누가 교통사고 났어? 죽었어?'라고 물었더니 상대방이 놀라더라고요. 이런 말을 하는 저도 스스로 이상하지만, 상대편에서도 이상했겠죠. 무속인은 생각해서 말하지 않아요.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와요.

▲ 배우 출신이었기에 최근 나온 영화 '파묘'나 이런 작품들을 어떻게 보셨는지도 궁금해요.

나를 출연시켰다면 더 리얼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죠.(웃음) 제가 무속인이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무속을 소재로 하는 걸 보면 아쉬운 부분이 더 눈에 잘 보여요. 희화화되거나 실제로 하는 행위와 다른 과장된 몸짓, 과장된 언어 표현도 있고요. 아니면 실제로는 더 잔인한 굿도 있어요.

▲ 실제로 선생님도 굿을 하시나요?

저는 작두를 탑니다. 누가 작두를 '거짓말이다', '쇼다' 이런 말을 하는데, 저는 '이런 망할'이라고 반박하고 싶어요. 물론 작두를 10개 넘게 올리고 하는 건 묘기고 차력입니다. 오래된 문헌에도 작두굿은 쌍칼날 혹은 외칼날에 올라간다고 돼 있어요. 작둣거리를 시작하면 5분은 놀아야 하는데, 신이 실리면 발이 안 나갑니다. 엄중함으로 하는 거죠. 차력으로 하면 다치지만, 신이 오시면 그런 게 없습니다.

▲ 이 일을 하면서 소름 돋았던, 초자연적인 경험을 한 적도 있었을까요?

어느 날 모녀가 찾아왔습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청담동에서 왔다'고 하더라고요. 전 그러면 반기를 듭니다. '내가 물어봤나요?'라고 했어요. '잘살고 있다는걸 뽐내려면 점 보러 왜 오나. 자문하러 오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러 오는데, 정호근이 아니라 정호근이 모시는 신을 보러 오는 거 아니냐'고요. 그 엄마도 화가 났는지 나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조심해야겠네'라고 했어요. 그러니 엄마가 어안이 벙벙해서 '내가 죽기라도 한다는 거냐. 재수 없는 소리 다 듣네'하면서 책상을 '탁'하고 치고 가더라고요. 딸도 그런 엄마를 말리지 않았어요. 팔짱 끼고 보고만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유세 떨지 말고 나가보라'고 했어요. 복채도 갖고 가라고 하고요. 그 후 1년인가 2년이 지나 남매가 와서 앉아 저를 보며 웃으면서 '저 모르시겠어요?'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어떻게 한번 본 사람을 알아보겠어요. 그때 오빠가 책상을 치고 갔던 엄마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기억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왜 왔냐'고 했더니, 엄마가 아침을 차려준 후 '아침마당'을 본다고 TV 앞에서 앉아 있었는데, 고꾸라지더니 중환자실에 가서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왜 운명을 알았는데, 붙잡고 피하는 법을 일러주지 않았느냐'며 '천도재를 할 수 있냐'고 묻더라고요. 어머니가 책상을 친 순간 이곳 신당과 인연은 끊어진 거라고 거절했어요. 그래도 그런 얘길 들으니 저도 허탈하고, 기분이 찜찜하더라고요.

▲ 신병을 앓을 때, 본인이 거부하면 아이들에게 가기에, 아이들을 위해 신내림을 받으셨다고 알고 있어요. 무속인이 된 후 가족들의 반응도 궁금해요.

제가 당당해서인지, 아이들도 창피한 거 없이 당당하게 잘 살더라고요. 열심히 공부하고, 주변에 누가 되지 않는 강인함이 있어요. 미국에서 유학 중인데 저는 생활비 외에 지원한 게 없어요. 학비는 모두 장학금을 받고 다녔거든요. 물론 저희 애들도 저에게 미래를 물어볼 때가 있어요. 이번에 대학원을 어디에 썼는데 '붙었냐?' 이런 것들이요.(웃음)

▲ 그런데도 상처받았던 주변의 반응들이 있었을까요?

엄청 많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욕도 듣기도 하고요. 요즘은 댓글로 그렇게 쌍욕을 해요. 그런데 보니까 대부분 인생이 고달픈 애들이더라고요. 잘되고 싶은데, 틀린 부분에 대한 지적을 당하면 거기에 대한 반감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남을 인정할 줄 모르고, 잘됐다고 겉으로는 박수쳐도 뒤에서는 저주하죠. 생전에 담배를 피웠던 신이 오시면 저도 담배를 피울 때가 있는데, '아버지가 골담배셨잖아. 지금 담배를 태우고 싶으시다고 하셔'라고 흡연 여부를 물어보고 담배를 태웠는데, 앞에서는 깜짝 놀라더니 '상담하는데 담배를 피우며 꼴값을 떠는 점쟁이'라는 댓글을 단 사람도 있었죠. 그런 걸 보면 누가 썼는지 다 알아요.

▲ 10년간 이 일을 하면서 건강도 많이 악화됐다고요.

지병을 앓게 됐어요. 말 그대로 공황장애가 왔죠. 사람들이 맨날 울고, 죽인다, 살린다 그런 말 들으면 우울해지죠. 신도 중 개인적으로 문자를 주고받는 분도 있는데 '오늘은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내리려 했다'는 메시지를 보내더라고요. 5년 동안 그런 연락을 받으니, 그날은 '뛰어내려'라고 했어요. 기상천외한 일도 많아요. 동물이랑 수간 하는 애도 오고. 가슴이 답답하더라고요. 그래서 매일 상담을 끝내면 걸어요. 아니면 산에 가고요.

▲ 이 일을 하면서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고정관념 중 꼭 바로잡고 싶은 부분이 있을까요?

신 아기가 신어를 읊고, 영검을 하는 것. 영검을 할 수 있지만, 자체적으로 말을 하고, 통달한 듯이 하는 건 무당이 아니에요. 거짓말하지 마라,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또 눌림굿이라고 하죠. 무당이 되는 걸 막는다고요. 그런데 무당이 될 팔자는 무당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굿으로 해방될 수 있다는 얘긴 낭설입니다. 신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그걸 어떻게 누르고, 피합니까. 그 비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저도 가서 배우고 싶네요. 그리고 무엇보다 인성이 중요하고, 그 후에 신입니다. 신을 앞세워 상처를 주고, 사기를 치면 혹세무민하는 겁니다.

▲ 올해 10월이면 신내림을 받은 지 꼭 10년이 됩니다.

10년이라고 따로 하는 건 없고, 전 매년 그 시기에 진적굿을 하면서 몸주신과 다른 신들께 예를 갖춰왔어요. 신은 계속 넘나들어요. 여신이 될 수도 있고, 남신이 될 수 있고, 장군신이 올 수도 있고 그렇죠. 신이 바뀔 땐 몸이 쪼개지는 아픔을 겪어요. 밤에 일어나면 침대가 땀으로 젖어있는 정도죠. 그래도 이겨내야 합니다. 그걸 극복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거죠.

▲ 앞으로 어떤 무속인으로 평가받고 싶으신가요?

무속인도 욕심이 많으면 안 됩니다. 욕심을 빼고 상담해야 뒤가 맑죠. 그렇게 이 할아버지, 이 형님에게 가면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마음의 위로를 받으며 치유가 되는 기운을 얻었다는 말을 듣는 '만신'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제자나 신딸, 신아들은 두고 싶지 않아요. 무속인도 굿을 배워야 하는 거고, 그걸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신 선생을 빼앗아 자기들끼리 굿을 하고, 따로 다른 선생을 구해 본인들끼리 굿을 하고, 이런 부분에 회의를 느꼈어요. 그런 신자식들에게 실망을 하면서 '다신 하지 말자'고 다짐했죠.

[이일내일]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주변의 우려와 걱정에도 안정적인 일을 때려치고 '이 일'이 '내 일'이다며 자신만의 길을 진취적으로 걸어가는 분들을 만나 봅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면 기사를 놓치지 않고 받아볼 수 있습니다. 좋아요는 큰 힘이 됩니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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