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중립론의 그림자는 지금도 아른거린다. 중립외교에서 파생된 균형외교가 그것이다. 균형외교는 미국과 중국의 양강 구도가 확립된 이후 진보 정부 외교노선의 금과옥조가 됐다. 미국과 중국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외교를 통해 실리를 챙길 수 있다는 주장이다. 노무현 정부 때의 ‘동북아 균형자론’,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도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더불어민주당도 중국과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틈만 나면 균형외교를 앞세운다.
미·중 간 신(新)냉전이 격화하고, 우방과의 가치동맹 블록화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한국만 균형외교가 가능하다고 보는 이유는 뭘까. 대부분이 대륙과 해양 사이에 놓인 지리적 특성을 꼽는다. 어디선가 들어본 얘기다. 19세기 조선중립론과 비슷하다. 외교 전문가들은 이런 논리를 ‘한반도 천동설’에서 비롯된 대표적인 착각이라고 말한다. 한반도가 세계의 중심이고, 국제 정세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세계관이다. 한반도 천동설은 얼마 전까지 외교가 일각에서만 거론된 ‘그들만의 용어’였다. 미국 국영방송 VOA(미국의소리)에서 펜타곤 담당 취재기자였던 김동현 작가가 <우리는 미국을 모른다>는 제목의 책을 작년 말 국내에 발간한 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일반 독자들에게도 본격 알려지게 됐다.
한·미 동맹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균형외교라는 단어는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국제사회에선 동맹국과 외교 관계를 두텁게 하고, 적성 국가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중국과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한국이 동맹국인 미국과 비동맹국인 중국 사이에서 산술적 균형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중국 환구시보 등 관영매체들은 윤석열 정부를 향해 틈만 나면 균형외교를 강조하고 있다. 중국 입장에선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중립과 균형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이득이기 때문이다. 대북 문제를 세계 최대 안보 현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양안 관계가 한반도 정세에 미칠 영향에 대해선 무관심한 것 역시 한반도 천동설이 가져온 폐해다. 미·중 갈등 구도에서 한반도와 대만 안보는 깊숙이 연결돼 있고, 미국의 개입 여부는 한국 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 와중에 문재인 전 대통령은 최근발간한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에서 자신의 임기 때가 외교의 화양연화(花樣年華·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였다고 했다.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 균형외교를 추구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문재인 정부의 균형외교를 그대로 계승하겠다고 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조만간 북한을 방문해 무기와 노동력을 받는 대가로 핵잠수함을 포함해 첨단 군사기술 이전을 다짐하는 상황이 펼쳐져도 그들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국제관계는 늘 선택의 비용을 치른다. 주변국을 모두 만족시키는 마법은 없다. 미·중 간 신냉전이 격화한 이후 미국은 세계 각국을 향해 끊임없이 누구 편인지를 물어보고 있다. 철저한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는 11월 미 대선에서 당선되면 질문의 강도는 더욱 세질 것이다. 중국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미국은 그보다 몇십 배, 몇백 배 더 중요한 우방이다. 영세중립을 선언하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구한말의 순진무구한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세 천동설은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허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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