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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4일, 이탈리아 정부는 비유렵연합(EU) 국가 출신이 ‘디지털노마드 비자’를 신청해 이탈리아에 머물고 일할 수 있는 제도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2022년 3월 28일 ‘디지털노마드 비자법’을 제정한 지 2년 만에 시행되는 것이다.
이 디지털노마드 비자로 1년을 이탈리아에서 머물며 일할 수 있고, 추후 갱신도 가능하다. 우선 비EU국가 시민이 이 비자를 받으려면 자기 법적 거주 국가의 이탈리아 영사관을 통해서 신청해야 한다.
대학 수준의 학위나 이와 동등한 직업 경력이 있는 자, 최소 연간 소득이 약 2만7000유로 가량인 자, 지난 6개월간 프리랜서 포함, 원격 근무를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업무 계약서를 소지한 자, 지난 5년간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없는 자가 이 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 추가로 이탈리아에 머무르는 기간의 건강 보험 가입 증명서 및 이탈리아 내 거주지 주소 등이 필요하다. 가족이 있는 경우 ‘동반 비자’도 신청할 수 있다.
트레비 분수 근처에서 햇살을 받으며 젤라토를 먹고, 근처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업무를 보다가 저녁에는 근사한 이탈리아의 프로세코(Prosecco)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 이 디지털노마드 비자가 유럽 스타트업 씬에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유럽에서 디지털 노마드 비자는 이탈리아가 처음이 아니다. 주로 관광업이 중요한 국가나 전문 인력 및 인구 부족에 고민이 여러 유럽 국가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이 디지털 노마드 비자 제도를 시행해왔다.
유럽 국가 중에 디지털화가 가장 잘 되어 있는 나라이자 특히 IT 분야 종사자들이 쉽게 체류할 수 있는 정책을 가장 먼저 선보인 나라는 에스토니아다. 그밖에 스페인, 포르투갈, 터키, 루마니아, 노르웨이, 몰타, 헝가리, 핀란드, 체코, 알바니아, 크로아티아, 키프로스 등이 디지털노마드 비자 정책을 가지고 있다.
여러 유럽 국가는 외국인이 각국에서 장기간 체류하고 일하게 되면 생기는 경제효과에 주목한다. 특히 지역 주민의 노령화가 심각한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들과 같은 곳에서는 이러한 외국인 유치정책에 거는 기대가 크다.
유럽 스타트업 생태계는 이런 정책에 어떤 영향을 받을까. 기술적 아이디어를 빠르게 성장시켜야 하는 스타트업의 경우, 직원 한 명 한 명의 능력치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스타트업에서 인재 채용은 미래의 성패가 달린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쏘아 올린 ‘유연한 근무 환경’ 이라는 조건은 팬데믹 이후에도 ‘좋은 직장의 조건’이 됐다. 스타트업의 입장에서는 비용 절감, 생산성 향상, 다양한 지역에서 더 넓은 인재풀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원격 근무’를 채용 과정에서 홍보하는 직원 혜택 중 하나로 묘사한다.
대체로 미국이나 아시아 국가에 비해 근무 강도가 낮고 워라밸이 좋기로 소문난 유럽의 업무 환경에서 ‘스타트업’을 선택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다. 근무 여건도 좋고, 연봉 더 높게 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대기업뿐만 아니라 탄탄한 중소 중견기업이 많기 때문에 굳이 ‘사서 고생할’ 사람이 아니라면 스타트업을 선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체계와 안정성이 없는 스타트업에서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내고 개척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스타트업의 기술을 성장시키는 데에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있거나 큰 기업의 부분적 업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회사에서 전체적인 시야를 갖고 여러 가지 업무를 경험해 보고 싶은 사람들이 주로 스타트업에서 일한다.
따라서 스타트업에서 ‘원격근무’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은 이제 좋은 인재 채용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지역 사회, 국가, 기업의 미래에 상상력을 가져다주었다. 휴가로만 갔던 휴양지에 전 세계에서 원격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의 자녀를 위한 100% 온라인 기반의 학교가 생기기도 했다. 몇 달간 잠시 머물 수 있는 숙소 정보가 공유되고, 이들을 위한 다양한 커뮤니티도 생겨나고 있다. 축구 선수 호날두의 고향 포르투갈 마데이라 섬의 이야기다.
원격 근무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게 되면서,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은 삶의 방식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원격 근무 전문 매체인 띵크 리모트(Think Remote)에 따르면 2023년에만 전 세계 디지털 유목민은 3500만 명이다. 2020년에 1090만 명으로 집계된 것과 비교하자면 폭발적으로 증가한 수치이다.
원격 근무자가 증가했다는 것은 원격으로 일할 수 있는 일자리도 많아졌다는 뜻이다. 실제 유럽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이 변화를 매우 가깝게 느낄 수 있다. 대부분 ‘원격 근무’가 가능한 환경이다 보니, 좀 더 낮은 연봉으로 더 좋은 스펙과 커리어를 가진 동유럽 쪽의 인재들에 이어 인도, 아프리카의 개발자 등을 인재로 채용하는 사례가 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타트업 생태계를 이루는 구성원이 다양해지면서 점점 멀게 여겨졌던 여러 세계가 동시에 천천히 만나고 있는 중이다. 기업의 업무 문화가 더욱 유연해지고 사람들의 삶의 양식도 더욱 다양해진다. 스페인에서 1년살이를 하며 한국과 미국과 일할 수도 있고, 태국에서 3개월 살이 등을 하면서 유럽의 기업과도 일할 기회들이 생기는 것이다.
덕분에 이런 환경 변화에 아이디어를 얻어 원격 근무자를 둔 기업의 업무 관리와 생활 등을 위한 또 다른 스타트업들이 생겨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영국 스타트업 데사나(Desana)는 글로벌 코워킹 스페이스 및 회의실 네트워크를 관리하며 원격 근무자와 기업을 위한 공간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이다. 덴마크 스타트업 버터(Butter)는 화상 회의와 온라인 교육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툴을 만든다.
독일의 유니콘 핀테크 기업 N26은 이탈리아 디지털 노마드 비자 정책 소식과 함께 유럽의 디지털 노마드를 위한 최고의 디지털 뱅킹 서비스를 제공하는 N26의 상품을 공격적으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변화가 있는 곳에 혁신적 아이디어가 피어오른다. 유럽 스타트업 생태계는 ‘지금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변화에 떠오르는 여러 아이디어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이은서 123 팩토리 대표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에코 시스템을 만들고 있는 123 팩토리의 대표다. 독일 베를린에 기반을 두고 스타트업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스타트업, 글로벌 기업, 투자자, 엑셀러레이터, 인큐베이터, 글로벌기업, 정부 기관 등 다양한 플레이어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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