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마다 강원도의 한 대학 캠퍼스 기숙사에 책을 쓰러 들어가곤 했다. 드넓은 캠퍼스 안에는 대학 본부, 학과별 강의동, 기숙사동, 오리들이 한가롭게 떠 있는 호수, 냉방 장치가 찬 공기를 뿜어내는 도서관, 스포츠센터, 우체국과 서점, 학생식당 등이 있었다. 기숙사 학생들이 떠나는 여름방학 동안 빈 기숙사는 실비를 받고 외부에 개방했다. 나는 책 몇 권과 소형 오디오 기기를 자동차에 싣고 기숙사에 들어갔다.
한밤중 불 꺼진 복도 바깥은 거대한 어둠이 들어차고, 유리창은 비현실적으로 큰 나방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숲과 인접한 탓에 새벽마다 되새, 곤줄박이, 쇠찌르레기, 노랑때까치, 솔잣새, 멧비둘기 따위가 지저귀는 소리로 꽤나 시끄러웠다. 새소리가 울려 퍼지는 새벽, 기숙사의 일인용 침대에서 일어나 공동 주방에서 커피 한 잔과 토스트 한 쪽으로 요기를 하고 정오까지 책상에 고개를 박은 채 글을 썼다.
한낮엔 매미 울음소리가 폭포수 떨어지듯 시끄러운 임간도로를 걷거나 스포츠센터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다. 저녁에는 웃통을 벗은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함성을 지르고 땀방울을 뿌리며 축구를 한다. 밤의 운동장을 밝히는 조명등 아래로는 나방과 날벌레들이 날아와 붕붕거렸다. 나는 스탠드에서 학생들의 축구 경기를 보다가 돌아왔다. 대학 기숙사에서의 일과는 단조롭지만 꽤 만족스러웠다.
소나무, 전나무, 주목, 구상나무, 가문비나무, 잣나무, 눈잣나무, 솔송나무, 갈참나무, 단풍나무 등등이 어우러진 한반도 중부의 건강한 수목 생태계를 품은 산자락을 차지하고 앉은 대학 캠퍼스에서 쾌적한 여름나기를 한다는 것, 그리고 조용한 기숙사가 책 쓰기에 최적화된 환경이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 해부터 대학 기숙사를 빌려 쓸 수 없게 됐는데, 그건 대학에서 더 이상 기숙사를 개방하지 않기로 방침을 바꾼 탓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일까? 20대 후반 출판사 창업을 하고 책 만들던 30대 시절 말고는 인생 전부를 글을 쓰는 데 바쳤다. 책에서 한 줌의 기쁨, 한 줌의 지혜를 구하던 사람이라 읽고 쓰는 전업작가를 열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의미의 생성에 잇대지 않은 일이란 존재가 작아지는 계기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직장에 매인 채 출퇴근하며, 집과 회사를 오가는 ‘버리는’ 시간, 의미가 맺히지 못한 채 사라지는 자투리 시간을 낭비하며 사는 인생에 회의했다.
하지만 출퇴근의 의무에서 면제된 채 자유롭게 책을 쓰고 그 수입으로 생계비용 일체를 감당하려고 했던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성인 열 명 중 여섯이 한 해 동안 책 한 권 읽지 않는 나라에서 그 꿈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 힘든 일을 서른 해 넘게 지속하는 나 스스로가 뿌듯해 가끔은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다. 그게 가능했던 건 내가 운이 좋았던 탓이다.
세월이 흘러도 여름은 다시 돌아온다. 눈부신 일광과 매미 울음소리로 가득 찬 숲속을 그리워하며 열대야에 불평을 터뜨리던 이들이 어디론가 떠날 때 나는 대학 기숙사에서 자발적 고립을 선택해 책 쓰기에 매달렸다. 새벽 기숙사에서 경험한 물아일체의 순간들, 교직원 식당에서 밥을 먹고 호숫가를 산책한 뒤 대학 도서관 책을 한 아름이나 빌려와 읽던 여름들!
돌아보니, 뭐, 그다지 심오한 책을 쓴 건 아니지만, 허송세월하지 않은 데 따른 내적 만족감은 컸다. 내가 환영받는 존재구나, 라고 뿌듯해하던 그 여름은 내 생애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었을지도 모른다. 책을 천천히 쓰던 그 여름이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쪽에 어쩐지 투명한 쓸쓸함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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