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 74세의 박태준은 미국에서 폐 밑의 물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에 걸린 시간은 6시간30분, 물혹 무게는 3.2㎏이나 됐다. 물혹을 해부한 의료진의 말이다. “혹 속에 이처럼 많은 규사가 들어 있는 경우는 처음 봤다.” 박 명예회장의 부인 장옥자 여사의 설명이다. “포항제철 초장기에, 특히 늦가을부터 봄까지 매일같이 불어댄 모래바람 때문이었을 거다.”(<박태준 평전> 저자 이대환)
1970년 포항제철소 건설 초기, 박태준은 황량한 영일만의 모래벌판에 전 사원을 모아놓고 이렇게 외쳤다.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다. 제철보국은 우리의 생활신조, 인생철학이 돼야 한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엄청난 죄를 짓는 것,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투신하자. 제철보국! 우향우!”
윤석열 대통령이 박태준의 우향우 정신을 소환했다. 어제 포항에서 열린 지방시대위원회에서 “박 명예회장이 포철을 건설했던 ‘사즉생’의 정신으로 저출생과 인구절벽, 지방소멸의 국가적 비상사태를 극복해 나가자”고 했다. 송복 전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뜻깊은 만남이 두 번 있었는데, 하나는 서애 류성룡과 이순신, 또 하나는 박정희와 박태준의 만남이라고 했다. 둘 다 구국의 만남이었다.
송 전 교수는 ‘태준이즘(Taejoonism)’이라는 용어도 지었다. ‘절대적 절망·불가능·사익은 없다’가 요체다. 50여 년이 지났지만 태준이즘은 여전히 살아있다. 1970년대에는 선진국이나 할 수 있었던 종합일관제철소 건립이라면, 지금은 국가소멸을 초래할 저출생 문제라는 과제만 달라졌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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