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이민자가 세우고 키워온 나라다. ‘아메리칸 드림’, ‘멜팅폿(Melting Pot)’이라는 수식어가 그 역사를 설명하고 이는 국가 전체에 통용되는 가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균열이 생기고 있다. 노골적인 ‘반(反)이민정책’을 내세운 공화당 후보가 2017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됐고 최근 들어서는 민주당까지 ‘국경 폐쇄’를 외치며 반이민 정서를 공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 시민들도 이에 반응한다. 지난 3월 3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 유권자 15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민·국경 안보 문제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71%였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국경 안보 대응에 비판적인 응답자는 65%로 2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대선 투표 시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이민을 꼽은 응답은 20%로 경제를 선택한 응답자 14%보다 많았다.
미국 세관국경보호국(CBP)에 따르면 2020년 연 40만 건이었던 불법 이민은 2021년 165만 건으로 4배 이상 늘어났다. 이어 2022년 240만 건으로 1년 사이 200만의 벽을 넘겼고 2023년 250만 건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 기록을 썼다.
미국 의회예산국(CBO)도 비슷한 자료를 공개했다. 이들이 지난 1월 추정한 ‘2000~2024년 이민자 분류별 증가 추이’에 따르면 합법적인 이민자와 임시비자가 있는 이주민 증가세는 이전과 큰 차이가 없으나 법원의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체류자인 ‘기타 이민자’는 240만 명에 달했다. 순이민자 수 자체도 330만 명에 달하며 최고 기록인 2005년 190만 명을 훌쩍 뛰어넘은 것인데 72% 이상이 불법 이민자인 상황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취임한 2017년 이후 변화의 양상이 보인다는 분석이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으로 밀입국 자체가 감소한 영향도 있었으나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강제 추방 정책인 ‘타이틀 42’가 당해 3월 시행됐기 때문이다. 보건법에 근거해 미 국경요원들이 국경을 넘어온 입국자를 즉각 돌려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으로 2022년 12월까지 약 3년간 200만 건 이상의 추방 조치가 집행됐다.
한편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한 2021년 급격히 불법 이민 단속 건수가 4배 이상 늘어났고 재임 중 불법으로 미국에 입경하다 체포된 이들은 630만 명 이상으로 알려졌다. 이는 트럼프, 버락 오바마,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임기 때보다도 더 큰 규모다. 그 배경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국경 장벽 철거’를 비롯해 트럼프의 정책인 타이틀 42를 2023년 5월 폐지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이민이 정치적 사안으로 떠오른 것은 2000년대 초중반. 마트 점원 등 일자리를 이민자들이 차지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2013년 이민자가 1960년에 비해 4배 늘어났고 일부 주에 제한됐던 것이 미 전역으로 확대됐다.
정책 변화의 조짐 또한 비슷한 시기 2014년 오바마 행정부에서 ‘이민 개혁 행정명령’ 도입 시도로 나타났다. 앞서 ‘1986년 이민 개혁 및 통제에 관한 법률’을 통해 1982년 이전에 입국한 모든 불법 이민 노동자에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정책에 이어 약 30년 만이었다.
당시 공화당 의원들이 이민자들이 일으키는 절도나 성폭력 등을 문제 삼으면서 법 집행이나 국가 안보와 연결시키며 숫자 조절에 나섰고, 반대로 민주당은 인권 문제로 대응하며 정치 양극화의 상징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실제로 미국 시카고 협의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민자는 미국을 위협한다’라는 질문에 1990년대 말까지 미국인들은 지지하는 정당과 상관없이 비슷한 결과를 보였다. ‘그렇다’라고 답한 비율을 보면 공화당 지지자가 56%, 민주당 지지자 58%, 무당파가 51%다.
반면 2009년부터 20% 가까이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해 2014년 30%로 늘어났고 2022년 7~8월 기준 공화당 지지자 70%, 민주당 지지자 18%로 이민자에 대한 정당 지지자별 입장 차이는 52%에 이르렀다.
오는 11월 3일 예정된 60번째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최근 양당의 후보들이 펼치는 공약들을 두고는 “이민정책이 경합주를 겨냥한 대선용 공약이 돼버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 모두 유권자 입맛에 맞춰 정책 방향을 뒤집는 등 전례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6월 4일(현지 시간) “불법 이민자가 하루 평균 2500명을 넘을 경우 망명 신청 절차를 중단하겠다”며 국경을 닫았으나 2주 만에 백악관에서 미국 거주 기간이 10년 이상이며 미 시민권자와 결혼한 불법 이민자에게 시민권 취득 기회를 주겠다는 친이민정책을 발표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운 첫 미국 대통령으로 지난 3월 선거유세에서 국경을 무단으로 넘은 이주자들을 향해 “그들은 사람이 아니다. 미국의 피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혐오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6월 20일(현지 시간) 실리콘밸리 기술 투자자 모임에서 “미국 내 2년제 혹은 4년제 대학을 졸업하거나 박사 학위를 딴 외국인은 미국에 체류할 수 있도록 영주권을 졸업장과 함께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외국인 창업자가 많은 실리콘밸리를 겨냥한 발언이다.
**미 경제발전 뒤에는 ‘불법 이민자’ 있다
미국 정책기관 이미그레이션허브의 전무이사 케리 탤벗은 이 같은 ‘국경의 정치화’를 비판하며 “양당 지도자들이 한발 물러서서 국경을 통제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국경을 폐쇄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의회의 노력이 있다면 충분한 자원이 확보된 안전하고 인도적인 국경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경제가 여전히 이민자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2년 가까이 지속되는 고금리에도 성장을 유지하는 미국 경제 뒤에 이민에 의한 노동력 증가가 있었다는 분석이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웬디 에델버그와 타라 왓슨은 이 같은 주제로 “불법 이민이 미국 경제가 강하게 유지되면서 인플레이션도 완화해주는 요인일 수 있다”는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미국은 작년 기준 한 달에 16만~23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흡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에서 창출된 일자리의 상당수가 ‘체류 가능자’로 분류되는 불법 이민자들에 의해 채워지면서 생산과 소비가 증가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팬데믹 이전 이 숫자는 월 6만~14만 명에 불과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에 870만 개의 채워지지 않은 일자리가 있으며 자국 내 노동자들만으로는 이를 채우기 부족한 실정이다”고 전했다. 이 같은 상황을 놓고 CNN은 “국내 기업들이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는 한편, 미국에서 일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 이민자들은 막으려 하는 역설에 빠졌다”고 지적한 바 있다.
중남미에서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는 합법적인 경로가 너무 적어 수요에 미치지 못해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도 지적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갈등이 커진 탓에 2000년대 이후 이민법 개정이 이뤄지지 못해 국가별 비자 발급 쿼터제 또한 경제와 인구 수준에 연동해 변화하지 못한 것이다. 미 싱크탱크 카토연구소는 “지금 이민을 신청하려는 멕시코와 필리핀 사람들은 100년 이상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임나영 인턴기자 ny92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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