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규제의 덫이 아니라 지옥이다

입력 2024-06-30 17:38   수정 2024-07-01 00:08

한국고등과학원(KIAS) 소속 세계적 과학자가 정년퇴임 이후 중국으로 옮겨 연구를 계속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정년제도는 근로자를 함부로 해고하지 말라는 사회적 합의였다. 그 선한 의도가 이제는 과학자의 직장을 빼앗는 규제로 성격이 바뀌었다. 보도에 따르면 그분을 계속 모시기 위해 노력했다지만, 미미하고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저런 눈치가 보였던 탓일 거다.

이렇게 규제는 세상의 변화나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회를 경직시킨다. 정년 규제는 다른 한편에서는 청년들의 고용을 막고 있다. 5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구직활동을 멈추고 ‘쉬었음’ 상태에 있는 청년의 수가 늘고 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12만7000명이 늘었다. 민간은 이미 공채를 포기하고 수시채용의 방법으로 전환했는데도 블라인드 채용 운운하면서 수시채용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신규도 안 되고 수시채용도 안 되는 취업의 지옥을 창조해 낸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청년을 교육하고 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규제는 특히 약자를 집중적으로 괴롭힌다.

인구 감소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민정책만큼 확실한 대안은 없다. 모든 선진국이 유연하게 구사하고 있는 이 정책을 한국은 못 하고 있다. 필리핀 가사도우미도 속 시원하게 유치하지 못한다. 최저임금제가 인류 보편의 가치도 아니고 그 부작용이 순기능을 압도하고 있음에도 이렇게까지 맹종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글로벌 기준인 월 100만원 안팎으로도 필리핀의 많은 가정에 엄청난 수입을 제공하고, 국내 워킹맘들에게도 숨을 돌릴 기회를 얼마든지 줄 수 있지 않은가. ‘이모님’도 데려오지 못하는데 과학자나 유능한 인재들을 어떻게 데려오겠는가?

정부는 규제개혁을 하겠다며 부산을 떨지만, 피상적인 시늉만 하고 있다. 30여 년을 그렇게 까먹었다. 모험과 도전을 지원한다는 규제 샌드박스나 규제 특구는 어차피 해야 할 규제 완화 조치를 한 장소에 가두고 찔끔찔끔 풀어주는 개미지옥과 다름없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연구개발특구위원회는 규제특례를 승인했다고 선심 쓰듯 발표했지만, 그저 안전관리 교육 절차를 완화하고 도시지하공간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작은 틈새를 열어놓았다는 내용일 뿐이다. 혁신해 보려고 몸부림치는 수많은 중소기업의 의지를 짓밟고,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희망이라는 마약만 주입하고 있다. 정부가 규제를 활용하는 유력한 이익집단으로 변질된 지는 오래됐다. 국민의 자유와 개성을 국정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는 지금 정부 역시 규제로 국민을 폭압하고 있는 상황이 놀랄 일인지, 당연한 일인지 판단은 각자의 관점과 지성의 몫이다.

국회는 어떠한가. 시민단체인 좋은규제시민포럼의 입법 모니터링에 따르면 22대 국회가 출범한 지 3주 만에 292건의 의안이 발의됐다. 그중 불량한 규제가 포함된 의안이 24%(70건)가 넘는다고 한다. 불량 규제까지는 아니더라도 80% 이상 법안이 규제의 신설과 강화를 담고 있을 것이다. 논란이 되는 파업조장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소위 노란봉투법)도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편파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사회적 문제를 찬찬히 살펴보고 섬세한 해법을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도 않고, 그저 큰소리로 금지하거나 어떤 일방의 책임으로 돌리는 식으로 법률을 제정하는 것은 이성적인 태도가 아니다. 정치는 이렇게 규제를 통해 책임을 회피하고 권력투쟁의 재료로 소진한다.

과거에는 우리의 현실을 ‘규제의 덫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고 표현했다. 덫이면 살살 피하기라도 할 수 있다. 오늘날 규제는 더 이상 덫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늪으로 빨아들이는 지옥과 같다. 개인의 자유와 책임감에 뿌리를 내린 도전과 벤처 그리고 창발이 꽃피어야 하는 이 시대에 우리나라만 규제의 지옥에 꽁꽁 묶여 신음하고 있다. 우리 국민은 국가와 정부에 순종하고 협조함으로써 성공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개성과 유연성, 책임감으로 무장한 개인으로 거듭나야 할 때가 됐다. 국가와 정부에 규제개혁을 요구하고, 이를 회피하는 자들을 무섭게 질타하는 까탈스러운 주권자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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