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이 장관 아니면 몰랐을 것"…'반도체 EDA' 각성한 정부 [강경주의 IT카페]

입력 2024-07-01 08:56   수정 2024-07-02 12:39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최근 이종호 장관의 특별 지시로 국내 반도체 전자설계자동화(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 업계 관계자들을 만난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가 EDA 업계 목소리 청취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장관의 지시는 글로벌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대한민국이 유독 EDA가 취약하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현장에선 반도체 전문가인 이 장관이 아니었다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란 반응이 나온다.
"EDA 없인 칩 개발 자체 불가능"
1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시스템 반도체를 맞춤형으로 설계해주는 EDA 소프트웨어(SW)가 글로벌 반도체 전쟁의 변수로 부상했다. EDA는 반도체 먹이사슬의 최상단 기술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은 EDA 불모지로 관련 사업을 하는 기업이 거의 없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반도체 설계 주권'을 거머쥐려면 지금이라도 EDA 업체를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반도체 설계 시 소모 전력을 분석하는 EDA 소프트웨어(SW) '파워 바움' 등을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에 공급하는 바움의 이준환 대표는 "국내에도 훌륭한 EDA 인재들이 많지만 10명 중 9명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 몇 안되는 EDA 업체 중 한 곳인 바움은 2013년 창업한 이후 국내에 EDA 뿌리를 내리겠다는 각오로 연구개발(R&D)에 매진했지만 인력 수급에 애를 먹고 있다.

EDA는 반도체 집적회로(IC) 디자인을 설계·검증할 때 필수로 사용하는 SW다. 후공정 패키징 디자인에도 쓰인다. 건축 설계도를 그릴 때 CAD(컴퓨터 지원 설계)를 쓰는 것과 유사하다. 반도체는 매 공정마다 고비용이 투입되기 때문에 오차 없는 설계와 이를 시험하는 테스트가 중요하다.

설계 결함을 칩 완성 후 알게 됐다면 다량의 칩을 폐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막대한 피해를 막기 위해 EDA 툴을 이용해 제조 전 시뮬레이션으로 회로 설계와 오류를 판단하고 문제를 검증한다. 최근엔 1000억개 이상의 트랜지스터를 하나의 칩에 집적하고 있어 EDA 없이는 칩 개발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다.
한국의 EDA 시장 점유율 사실상 '0'
문제는 EDA 시장을 소수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글로벌 EDA 점유율은 시높시스 32%, 케이던스 30%, 지멘스EDA 13%이다. 미국 3사가 세계 시장 75%를 차지해 독점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비롯해 전 세계 주요 팹리스들은 전부 3사의 SW를 사용할 정도로 고객사가 탄탄하다. 이들 3사는 300회에 가까운 인수합병을 통해 위치를 공고히 했다. 한국에도 EDA 기업이 두어 곳 있지만 시장 점유율은 '제로(0)'에 가깝다. 독점 구조가 형성된 만큼 가격은 부르는 게 값이어서 비용 부담이 커졌다는 게 팹리스 업계의 공통된 하소연이다.

미국이 대중국 반도체 규제를 강화하면서 EDA 기술의 중요성은 점점 부각되는 있다. 미국이 중국 업체가 자국 EDA를 쓰는 것을 막자 현지 반도체 생태계가 올스톱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후 주요국은 EDA를 반도체 전쟁의 전략 무기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EDA 사용 조건을 까다롭게 제한하고 비용도 높이는 추세다.

국내 팹리스 기업은 글로벌 대중국 반도체 규제 이후 훌쩍 뛴 EDA 비용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 SW 가격은 용도에 따라 수억원에서 수십억원 수준이다. 초기 스타트업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국내 팹리스에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과기정통부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우선 EDA 구매 비용을 세액공제해준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 장관의 특별 지시로 국내 반도체 EDA업계 관계자들과 면담도 했다.

반도체 산업 고도화와 AI 반도체 수요 증가로 EDA 중요성이 더 강조되면서 이같은 추세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KAIST 공정거래연구센터가 작성한 '반도체 산업 실태조사' 보고서에서 "시높시스 등은 기술 우위를 핵심 역량으로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며 "마치 PC 시장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와 '오피스'가 지배적 지위를 차지한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월적 지위의 EDA 회사들은 자사 솔루션과 호환성을 지렛대로 신규 회사의 진입을 어렵게 해 경쟁당국의 주의가 요망된다"고 밝혔다.
생성형 AI 시대 EDA 중요성 더 커져
국내엔 EDA 생태계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EDA 시장은 기술력을 앞세운 미국과 정부의 과감한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의 독과점 체제가 이어지고 있어 한국 우수한 인재들이 EDA 창업에 도전할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

국내 인재들은 박사 과정을 밟고 미국 EDA 3사로 유입되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다. 중국은 300여개의 EDA 기업이 있고, 그 중 상위 10개 업체는 일부 기술 독립을 이뤘을 정도로 성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반면 한국에는 바움, 알세미 등 손가락에 꼽을 만한 몇몇 업체만 고군분투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한국도 생성형 AI 시대를 맞아 자체 EDA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지금까지는 설계 엔지니어가 EDA를 활용해 직접 회로를 그려왔다.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만큼 설계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이를 AI 기반으로 바꾸면 반복적인 설계 작업을 단순화하고 신속하게 처리, 회로 설계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수작업의 경우 몇개월까지 걸렸던 회로 설계를 AI로는 2~3시간 만에 구현한다. 영국 시장조사기관 EMIS는 글로벌 EDA 시장이 2020년 108억 달러에서 2026년 183억7000만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김용석 성균관대 반도체융합공학과 교수는 정부가 경제안보 관점에서 EDA 육성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고대역폭메모리(HBM)는 한국이 최강국임에도 AI와 HBM을 '인티그레이션'(통합)하는 EDA 기술은 아직 없다"며 "대만이 이 기술을 노리고 있는데 HBM 종주국인 한국이 뺏겨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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