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그 여자야 선택해"…조강지처 쫓아내려던 천재, 결국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4-07-13 10:10   수정 2024-07-15 09:51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요. 지금 당장 선택해요. 그 여자를 버리고 나랑 결혼할 건지, 계속 그 여자랑 살 건지.”

카미유 클로델의 말에 거장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클로델은 로댕의 수제자이자, 천재적인 재능의 조각가면서, 로댕이 그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 반면 로댕이 함께 살고 있는 그 여자는 젊지도, 똑똑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평범한 중년 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로댕이 가장 가난하고 힘들었을 때 로댕을 지탱해준 사람이었습니다. 오랜 침묵 끝에 로댕은 입을 뗐습니다. “나는 도저히 그녀를 떠날 수 없어.”

클로델의 표정은 차갑게 굳었습니다. 곧이어 클로델이 말했습니다. “나와 결혼한다는 그 말은 역시 다 거짓말이었군요. 그럼 우리는 여기까지네요.” 돌아서서 떠나는 클로델의 뒷모습을 보며 로댕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로댕은 몰랐습니다. 자신의 선택이 불러온 결과로 20년 뒤 클로델은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하고 만다는 것을요. 그리고 클로델은 그곳에서 30년을 갇혀 살다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는 사실을요. ‘세기의 천재 조각가 커플’이었던,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이야기.


조각을 한다는 것

“조각가가 되는 건 미친 짓이다.”
19세기 프랑스 예술계에는 이런 말이 나돌았습니다. 재료를 깎아내는 고되고 지저분한 작업 과정, 오랜 제작 기간과 막대한 재료비보다도 조각가들을 더 괴롭게 했던 건 ‘먹고 살기 힘들다’는 사실. 조각은 그림보다 비싸고 전시하기도 어려워서, 작품을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각가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장 루이 브라이언(1805~1864)입니다. 1864년의 어느 겨울밤, 브라이언은 전시에 출품할 헤르메스 조각상을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방은 난방이 되지 않았습니다. 애써 완성한 점토 조각상이 추위로 깨져버릴까 봐 걱정했던 브라이언은, 딱 한 장 갖고 있는 담요를 자기 몸 대신 조각상에 덮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브라이언은 점토 상 옆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하지만 조각을 한다는 행위는 인간의 본능과 맞닿아 있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가 작은 손을 이리저리 흔들다 장난감을 꼭 쥐듯, 아이들이 흙과 모래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데 열중하듯, 뭔가를 만지고 만들어내는 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욕구.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조각가의 삶이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조각의 세계에 몸을 던졌습니다. 클로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클로델은 1864년 프랑스 북부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클로델의 집에는 기와를 굽는 가마가 딸려 있었고, 주변에는 붉은 점토가 널려 있었습니다. 덕분에 클로델은 어릴 때부터 점토를 만지고 구우며 조각가의 꿈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나는 조각가가 될래요. 우리, 예술의 도시인 파리로 이사 가요.” 클로델은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부모님을 조르곤 했지요. 하지만 어머니의 대답은 차가웠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럴 만도 했습니다. 당시 여성에게 허용되는 직업은 누군가의 아내와 어머니, 아니면 수녀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해도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당하는 조각이라니.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딸 바보’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일찌감치 클로델의 재능을 알아보고, 유명 예술가인 알프레드 부셰에게 부탁해 클로델이 조각을 비롯한 미술을 배울 수 있게 해준 것도 아버지였습니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보렴.” 클로델이 17세 되던 1881년, 아버지는 클로델의 ‘파리 유학’을 허락했습니다.



파리에 도착한 클로델은 스승인 부셰의 작업실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조각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타고난 재능 덕분에 클로델의 실력은 일취월장했습니다. 부셰는 자랑스러운 제자를 미술계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곤 했습니다. 그 중 한명은 클로델의 작품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정말 훌륭한 작품이에요! 로댕 선생에게 레슨을 받았군요!” 하지만 자신의 조각에만 관심이 있을 뿐, 당대 미술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던 클로델은 어리둥절했습니다. ‘로댕이 누구지?’

이 궁금증은 2년 뒤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풀리게 됩니다. 미술상을 받은 부셰가 상금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클로델을 비롯한 자신의 제자들을 로댕에게 맡겼거든요. 이렇게 클로델과 로댕의 운명적인 만남은 우연한 계기로 시작됐습니다

클로델, 로댕을 만나다



로댕이 클로델을 처음 만난 1883년, 로댕은 마흔세 살이었습니다. 25년간 가난과 무시를 견디며 조각을 해온 그는 이제 막 미술계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참이었습니다. 그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건 20년 전 만난 동반자, 로즈 뵈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이었습니다.

조각가와 모델로 처음 만난 둘은 젊은 날 아름다운 사랑을 했습니다. 뵈레는 재봉사와 세탁부로 일하며 가난한 연인 로댕을 먹여 살리고 돌봤습니다. 둘 사이엔 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댕은 뵈레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서였지만, 나중에는 뵈레가 자신에 비해 부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뵈레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글을 쓸 수 없었습니다. 예술적인 대화를 함께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그녀를 부끄러워한 로댕은 친구들에게도 뵈레를 소개해주지 않았습니다. 둘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 어린 시절 창문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친 후 둔재가 되면서, 자신을 먹여 살리느라 뵈레의 얼굴에 주름이 늘어 가면서 이런 생각은 더해졌습니다.



그런 로댕에게 작업실에 제자로 들어온 19세의 클로델은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연인이었습니다. 클로델은 천재적인 재능 덕분에 금세 로댕이 가장 신뢰하는 조수가 됐습니다. 로댕이 조각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로 여기는 손의 조각을 클로델에게 맡길 정도로요. 게다가 클로델은 똑똑했고, 대화가 통했으며, 아름다웠고, 로댕이 왜 어떻게 훌륭한지를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클로델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어.’ 로댕은 생각했습니다. 클로델과 함께 있을 때면 로댕은 무한한 영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뵈레는 나이 들고, 둔하고, 못생겨 보였습니다. 로댕은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로댕의 끊임없는 구애에 머지않아 둘은 연인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건 비밀이었습니다. 로댕은 뵈레의 눈치를 봤고, 클로델은 주변의 시선을 신경 썼습니다. 로댕의 사랑은 그야말로 열정적이었습니다. “당신 없인 살 수 없어.” 클로델이 출장을 갈 때마다 로댕은 나잇값도 못 하고 애절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반면 클로델의 감정은 로댕의 열정적인 사랑과는 좀 다른, 존경과 필요가 섞여 있는 감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클로델이 로댕에게 보낸 편지는 연인이라기보다는 마치 누나나 여동생이 보낸 것 같습니다. “몸이 다시 아프다니 유감이네요. 이상한 사람들을 자주 만나니까 그렇죠.”



클로델에게는 로댕이 필요했습니다. 여성이라는 한계를 넘어 조각가로 계속 살 수 있게 해줄 사람으로서, 자신을 예술계에서 보호하고 이끌어줄 사람으로서. 당연히 로댕도 클로델의 이런 의도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불만은 없었습니다. 클로델이 옆에 있기만 하면 그걸로 만족했으니까요. 로댕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클로델의 재능과 실력을 널리 알릴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애인의 뒷배를 봐주는 일이었지만, 다행히 그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클로델의 작품은 뛰어났습니다.

클로델은 오직 자신의 재능과 본능에 따라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미술사나 과거 거장들, 동시대 미술 트렌드에 관한 공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결과물은 탁월했습니다. 클로델을 높이 평가하는 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강렬함 때문에 사람을 약간 지치게 만드는 로댕의 작품과 달리 클로델의 작품은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내면의 고요한 고독감, 친밀함과 같은 섬세한 감정들을 우아하게 전달한다.

클로델 작품의 이런 매력은 고대 인도의 문학 작품을 주제로 한 ‘샤쿤탈라’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 작품은 1888년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시인 살롱전에 전시돼 “올해 가장 특별한 신작”이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말도 나왔습니다. “아무리 로댕의 제자라지만, 너무 작품이 똑같은 거 아냐? 몇 년 전에 로댕이 발표한 ‘키스’와 똑같잖아.




자세히 보면 두 작품은 입맞춤이라는 주제를 제외하면 질감이나 양감 등이 매우 다릅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 나름의 이유도 있긴 했습니다. 여성 예술가는 남성 예술가만큼의 창의성과 예술성을 가질 수 없다는 편견이 뿌리 깊이 박혀있던 시대였고, 어쨌거나 클로델은 로댕의 제자였으며, 두 사람의 작품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도 사실이고, 무엇보다도 둘 다 ‘사실적으로 잘 깎는다’는 아주 강력한 공통점이 있었으니까요


배신, 그리고 광기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로댕의 아내로서 살아가려면 이 정도는 받아들여야 하겠지.’ 클로델은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당연히 로댕의 아내가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로댕이 결혼을 약속했으니까요. “조금만 상황이 정리되면 우리 결혼하자. 뵈레? 그 여자는 그냥 나를 도와주는 사람일 뿐이야. 결혼한 것도 아닌걸.” 로댕은 파리에 두 사람의 작업실 겸 보금자리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클로델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결혼 얘기를 꺼낼 때마다 로댕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결혼을 미뤘습니다. 로댕은 낮에는 작업실에서 클로델과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밤에는 어김없이 뵈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서 둘의 관계도 서서히 역전됐습니다. 이 시기 클로델의 편지에 드러나기 시작하는, 로댕에 대한 호소가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나는 당신이 마치 내 곁에 있는 것처럼 알몸으로 잠자리에 들지만, 깨고 나면 다시 혼자라는 것을 느낍니다.”

클로델은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고 말았습니다. 로댕은 뵈레를 떠날 생각이 없다는 걸. 28살이 되던 1892년 마침내 클로델은 최후통첩을 날렸습니다. “나인가요, 그 여자인가요.” 그리고 로댕은 뵈레를 택했습니다. 전혀 예상을 못 했던 건 아니지만, 클로델에게는 충격적인 배신이었습니다. 로댕의 약속을 믿고 그와 함께했던 젊은 시절이 모두 날아가 버린 거니까요. 게다가 클로델은, 로댕의 아이를 가졌다가 낙태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듬해인 1893년, 클로델은 로댕의 작업실에서 나와 완전히 독립합니다. 하지만 클로델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로댕의 배신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 오랫동안 조각을 하며 쌓인 육체적·정신적 피로, 경제적인 어려움, 로댕의 제자로만 취급받는 현실, 아이를 떠나보낸 데 대한 죄책감과 후유증…. 그녀가 약해진 사이, 애써 묶어둔 마음속 어두운 부분은 서서히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습니다.



로댕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클로델에게서 ‘쎄한’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는 겁니다. 프랑스의 한 작가(폴 모랑)는 어린 시절 자기 집을 찾은 로댕의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습니다.

“어느 날 로댕이 우리 집에 왔다. 아버지는 ‘로댕이 한 여인에게서 도망쳤다’고 말씀하셨다. 로댕처럼 덩치 큰 남자가 여인을 무서워하다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이건 웃을 일이 아니야. 그 여인은 로댕의 최고의 제자였고, 천재였고, 아름다웠고, 로댕을 사랑했지만, 미쳤어.’” 로댕은 클로델의 갑작스러운 분노, 사람들에 대한 이유 없는 의심, 때때로 이성을 잃게 하는 망상을 여러 번 목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클로델의 광기는 배신당하고 의지할 곳을 잃자 점점 더 커졌습니다. 한 기자는 클로델을 보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클로델의 신뢰를 얻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녀는 내성적인 데다 비합리적인 의심을 많이 한다. 반갑지 않은 방문객은 매몰차게 내쫓는다. 이상한 이야기도 많이 한다. 편집증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것 같다.”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미련이 남아서였는지, 로댕은 클로델과 헤어진 후에도 클로델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기는 했습니다. 클로델이 “이제 나한테 제발 연락하지 말라”고 하자 중간에 다른 사람을 끼워 넣어 가며 여러 방법으로 그녀의 작품을 사주고, 제작비를 미리 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부쳐 줬습니다.



하지만 클로델이 서른다섯 살이던 1899년, 둘을 결정적으로 갈라놓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전히 복수심을 간직하고 있던 클로델이 로댕과 자신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폭로하는 작품 ‘성숙의 시대 2’를 발표하려고 한 겁니다. 둘의 관계가 비밀이긴 했지만,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로댕과 클로델이 한때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

클로델은 말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을 표현한 작품이에요. 오른쪽의 여성은 ‘젊음’, 남성을 데려가는 노파는 ‘시간’을 상징하는 거지요.” 하지만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세 명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클로델, 뵈레, 그리고 로댕 말입니다.

로댕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압력을 넣어 이 작품의 공개 전시를 취소시켰습니다. 클로델의 입장에서는 분통 터지는 노릇이었습니다. 여전히 클로델의 상황은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집에서 계속 생활비와 재료비를 받아 써야 했고, 이 때문에 클로델의 가족들은 큰 부담을 지게 됐습니다. 오랜 고난으로 창조력과 건강도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를 본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클로델이 완전히 시들고 있다.” 그보다 더 심한 건, 극심하게 날뛰는 광기였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괴팍하고 내성적인 정도였던 클로델의 성격은 갈수록 병적으로 변했습니다. “로댕이 내 작품을 훔쳤어. 내 모든 예술을 빼앗으려고 해. 로댕이 나랑 주변 사람들에게 독을 먹이고 있어….” 중견 조각가인 로댕이 명성을 얻어 세계 최고의 조각가로 인정받게 되자 그녀의 망상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부수고 묻어버린 뒤 “로댕이 훔쳤다”고 하거나, 멀쩡한 사람을 두고 “로댕이 이 사람을 보내서 나를 죽이려고 한다”며 고소하거나, “3000년 전부터 로댕이 나를 착취하고 가족 모두를 독살하려고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집은 엉망이 됐습니다. 매일같이 이상한 일을 저지르고 사고를 치는 클로델을 욕하는 이웃들의 원성도 날로 높아져 갔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로댕을 욕하는 내용의 편지, 욕설을 잔뜩 쓴 편지, 고양이 똥을 담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젊고 아름다운 천재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의 모습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삶이라는 조각

1913년, 여전히 클로델을 응원하고 믿어 주던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클로델을 정신병원에 강제로 넣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머니는 예전부터 클로델이 가족을 망신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로델이 한때 로댕과 연인 사이였다는 사실을 안 뒤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랬던 클로델이 완전히 미쳐 날뛰고 있다니,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클로델은 그 이후 30년을 더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상 정신병원에 입원한 1913년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클로델의 상태는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고, 로댕에게 독살당할 수도 있다는 망상 때문에 항상 직접 삶은 감자와 날달걀만 먹었다고 합니다.




간혹 상태가 좋아져 병원 측에서 퇴원을 권유할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클로델도 간절히 퇴원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클로델의 가족은 “제발 퇴원시키지 마라. 돈도 없고 돌볼 수도 없다”며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클로델이 병원 밖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없게 해달라”고 여러 번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가족들은 1943년 클로델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클로델은 이름 없는 무덤에 묻혔습니다.

클로델이 맞은 이런 운명은, 미술사에 남은 작가들의 숱한 비극적 삶들 속에서도 압도적으로 비참합니다. 1950년대 이후 그녀의 작품이 재조명받았고, 영화를 비롯한 여러 매체가 그녀의 삶과 재능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클로델이 생전 겪은 불행에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습니다. 시대를 거슬러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불행한 운명 앞에서 무력하게 무릎을 꿇었다는 점에서 그리스 비극이 떠오를 정도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클로델의 작품 곳곳에 이런 삶을 예견하는 듯한 요소가 숨어 있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겪을 불행한 미래를 몰랐을 텐데도 말입니다. 예컨대 이 ‘파도’가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바다에서 즐겁게 손을 잡고 놀던 세 여성은, 갑자기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파도에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운명의 손이 이들을 들어올려 꽉 쥐어버리듯, 파도 역시 등장인물들을 삼켜버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클로델의 작품은 생동감과 신선함이 넘치는 표현, 자연스러운 몸과 얼굴, 부드러운 표면이 돋보이는 우아함이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계속 바라보다 보면, 그와 대조되는 인물들의 묘하게 쓸쓸한 표정과 몸짓이 마음에 새겨집니다. 이는 클로델의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매력이기도 합니다.



클로델의 천재성은 그녀가 돌을 깎아 인간의 가장 솔직한 감정, 꿈과 좌절, 사랑과 고통을 가감 없이 드러내도록 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삶이라는 재료를 깎아내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 그 실패가 자신의 실력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i>**이번 기사는 Camille Claudel: A Life(Odile Ayral-Clause 지음)를 중점적으로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카미유 클로델에 관한 전기로,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여러 자료들이 수록돼 있습니다. 카미유 클로델을 '신화'로 만든 영화 등 다른 매체와 달리 그녀의 삶이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서술돼 있습니다. 이 밖에 일부 세부사항이나 작품에 대한 해석 등은 Camille Claudel(Reine-Marie Paris 지음), Camille Claudel: A Sculpture of Interior Solitude(Angelo Caranfa 지음)에서 참조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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