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가 모여드는 나라, 빠져나가는 나라[EDITOR's LETTER]

입력 2024-07-24 13:52   수정 2024-07-24 13:53

[EDITOR's LETTER]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이탈리아의 건축가입니다. 미술 시간에 배운 원근법을 발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피렌체의 상징인 유명한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두오모 성당의 아름다운 지붕을 완성한 것으로 더 유명합니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무대가 되는 곳, 이탈리아 여행의 필수 방문지입니다. 그가 이 건축물을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르네상스 시대를 만든 빛나는 요소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1401년 피렌체시는 흑사병 퇴치를 기념하기 위해 산 조반니 세례당 청동문을 제작하기로 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경쟁입찰을 진행합니다. 브루넬레스키도 참여했습니다. 뛰어난 작품성임에도 경쟁자인 로렌초 기베르티에게 밀리고 말았습니다. 기베르티가 제작한 이 세례당 청동문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천국의 문”이라고 극찬했지요.

경쟁에서 밀린 브루넬레스키는 로마로 유학을 떠납니다. 로마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피렌체로 돌아온 그에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옵니다. 100년 넘게 지붕이 없던 두오모 성당을 완공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됩니다. 심사위원들은 공정한 심사를 거쳐 브루넬레스키에게 이 공사를 맡깁니다. 한 영화에는 브루넬레스키가 날 계란을 깨서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오모 성당의 큰 돔을 어떻게 올릴지 원리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 아래 브루넬레스키는 1437년 피렌체의 상징을 완성합니다.

천재들의 공정한 경쟁, 패자부활의 기회,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최대의 후원자인 메디치 가문까지. 당시 피렌체가 갖고 있던 이 보이지 않는 시스템은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기반이 됐습니다.

이 시스템이 왠지 낯익지 않으신지요. 그렇습니다. 오늘날 실리콘밸리와 여러 면에서 닮아 있습니다. 세계의 천재들이 모이는 것도 비슷하고, 한번 실패해도 두 번째 도전이 가능하며, 미국 정부와 수많은 스타트업 투자자들이 21세기 메디치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프랑스의 지성 자크 아탈리가 ‘미래의 물결’에서 말한 세계의 거점이 됐던 도시들도 비슷한 특성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탈리는 자본주의 맹아기 이후 세계의 거점도시는 베네치아, 암스테르담을 거쳐 런던, 보스턴, 뉴욕, 캘리포니아로 순차적으로 이동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세계의 중심은 실리콘밸리를 품고 있는 캘리포니아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아탈리는 세계의 거점도시가 태평양을 건너 다시 동쪽으로 이동할 기회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폐쇄성으로 인해, 홍콩은 사회주의 때문에 거점이 될 기회를 잃었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때 마지막 남은 동북아의 도시는 혹시 서울 아닐까라는 공상을 해본 적도 있었습니다.

공상은 공상일 뿐이었습니다. 국내에서 패자부활의 기회를 이용해 큰 성공을 한 창업자는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가장 뜨거운 인공지능(AI) 시장을 보면 천재가 모여드는 게 아니라 한국에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AI인덱스 2024’에 따르면 한국은 1만 명당 AI 이동 지표가 –0.3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플러스는 인재가 유입되는 것이고 마이너스는 AI 인재가 해외로 유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기술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정부와 투자자들의 움직임도 활발하지 않습니다. 미국은 정부 차원에서 ‘2020 국가 AI 이니셔티브 법’을 제정하고, 상원은 반도체와 AI 등의 기술개발 및 생산에 2500억 달러 집중 지원 내용을 담은 ‘혁신 경쟁법’을 통과시키며 지원에 나서고 있습니다.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은 오늘도 새로운 AI 스타트업 투자에 여념이 없습니다. 한국의 투자는 여전히 겨울입니다. 작년 정부는 연구개발 예산을 대폭 삭감하며 인재들의 사기를 꺾어버렸습니다. 해외에서 일자리를 찾아보겠다는 연구자들의 얘기가 끊이지 않습니다. 한국의 창업 생태계는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스타트업 투자 부진은 올 상반기까지 이어졌습니다. AI 경쟁에서 빛나는 한국 기업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계의 거점도시는 고사하고 3년 후, 5년 후 먹고살 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을 헤쳐나갈 리더십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기러기 떼의 비행 같은 무계획의 힘에 기대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기러기 떼는 한 마리의 리더를 따르지 않고 수시로 가장 힘이 드는 선두 기러기를 교체하며 V자 대형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고민이 깊어지는 여름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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