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그러니까 2004년이면 ‘미안하다, 사랑한다’ ‘발리에서 생긴 일’ ‘파리의 연인’ 같은 드라마들이 방영되던 시기다. 한국 드라마가 아시아 시장에서 한류를 타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새삼 20이라는 숫자가 묵직하게 느껴진다. 많은 게 달라진 것 같으면서도 어쩌면 모든 게 그대로일 거란 생각이 든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처음 들은 음악에 열광했던 그때의 감정은 20년이 지나서도 잊히지 않는다.
시간이동이라도 한 듯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키만 자라난 어린아이 그대로인 것 같다. 반대로 어른이 돼가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일들을 경험한 만큼 결코 빠르게 지나간 가벼운 시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몇 년 전 1990년대 인기 아이돌 그룹 ‘젝스키스’ 출신의 가수가 팬 사인회에서 아이를 안고 엄마가 된 팬을 보며 놀라는 장면이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됐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로애락의 삶을 겪었을 엄마를 한순간에 20년 전 소녀 팬으로 되돌린 소중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뭔가 긴 시간 동안 순수하게 좋아한 경험은 몹시 귀하다.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팬덤’에 대해 ‘개인의 취향 아이덴티티를 남과 구별하는 방법’으로 설명했다. 그 대상이 꼭 가수나 스포츠 선수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남을 따라 하지 않고 누가 시켜서가 아닌 방법이면 무엇이든 된다. 온전히 나에 의해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했다면 온전히 내 취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며 순수한 감정이 기억나지 않을 때도, 한동안 그것을 잊고 살아가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덕질’은 내 삶을 이끈 꽤 큰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잘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할 때 알 수 없는 어떤 힘을 얻기도 한다. 어릴 때 ‘왜 어른들은 요즘 노래를 안 듣고 옛날 노래만 부르는 걸까’ 궁금한 적이 많았다. 내가 좋아했던 음악으로 어떻게 내가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는지 깨닫고 나니 조금은 부모님의 취향도 이해하게 됐다.
20년이 40년이 되고 더 많은 날이 흐를 것이다. 그때쯤 되면 지금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아이돌 그룹의 누군가도 엄마가 된 팬에게 사인해주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시작됐던 다시 돌아온 이곳, 마침내 만나게 된 긴 여행의 끝’. 2인조 밴드 페퍼톤스의 노래 ‘긴 여행의 끝’에 나오는 가사다. 많은 이들에게는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추억이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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