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괴짜 총장', 저출생 대책으로 '다둥이 특례' 꺼냈다

입력 2024-07-22 08:31   수정 2024-07-22 10:10



“저출생은 과도한 경쟁이 종족 보존의 본능을 마비시키는 단계에 이른 결과입니다. 국가보훈 가족, 농어촌, 저소득층 뿐 아니라 자녀가 셋 이상인 다자녀 가정의 학생까지 별도로 뽑는 ‘고른기회전형’의 비중을 전교생의 10%까지 확대하겠습니다. 카이스트가 과도한 경쟁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99년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처음 소니를 따라잡자 일본은 충격에 빠졌다. 2001년 집권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특별 위원회를 만들어 '소니가 삼성에 진 이유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위원회의 결론은 "일본에는 카이스트가 없다"였다.

카이스트는 1971년 과학 인재 양성과 과학기술 연구를 설립된 국립 특수 대학교다. 국가가 키우는 영재들이지만 카이스트 출신들은 전통적으로 주입식 교육을 잘 소화하는 엘리트보다 ‘자유분방한 학풍이 길러낸 창의적인 괴짜들’이 많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토양을 만드는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2021년 취임한 이광형 총장(사진)이다. 1999~2000년 81부작으로 방영된 TV드라마 '카이스트'에서 TV를 뒤집어 놓고, 10년 후의 달력을 펼쳐 놓는 괴짜 교수 박기훈(안정훈 분)의 실제 모델이다. 지난 11일 이광형 총장을 서울 정부종합청사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 인터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래학자이기도 한 이 총장의 관심사는 저출생·고령화의 원인과 해결책에서부터 의대 편중, 인문학의 위기, 인공지능(AI) 경쟁력까지 영역 구분이 없었다. '학문의 순수성, 상아탑' 대신 '기업에 잘 팔리는 학생, 고부가가치 학문, 대박을 내는 연구'를 강조했다.



▷과학자이자 미래학자로서 저출생의 원인을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과도한 경쟁이 종족 보존이란 인간의 본능을 마비시키는 단계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면 힘들기도 하지만 행복감의 크기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잖아요. 우리 사회가 이 행복감을 공유해야 하는데 경쟁이 너무 심하다 보니 고통만 얘기합니다.”

▷카이스트는 어찌보면 과도한 경쟁을 잘 이겨낸 학생들이 모인 곳인데요.
“대부분의 학생들이 서울의 학교를 다니고, 서울에서 살기를 원하지만 카이스트 학생들은 좀 다릅니다. 자유분방하고, 독창적인 사람을 우대하는 카이스트에서 하고 싶은 연구를 맘껏 해보고 싶다는 학생들이 일부러 대전까지 찾아옵니다. 그래서 학교를 다니다가 의대로 빠져나가는 학생도 굉장히 적습니다. 전국의 대학들이 신입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지만 카이스트의 경쟁률은 점점 올라갑니다. 카이스트는 기적입니다.”

▷과도한 경쟁의 대표적인 폐해인 사교육을 잡을 방법이 있을까요.
“현실성 없는 얘긴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의 별에서 빛난다’라는 가치관을 심어주는게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성적 외에도 다양한 가치관이 있다는 걸 학교가 심어줘야죠.”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모두가 입시경쟁을 치르는 나라에서 인식 전환이 쉬울까요.
“그래서 카이스트는 고른기회전형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대학이 입학 정원의 5%를 농어촌 출신이나 저소득층 학생에게 배정하는 고른기회전형을 합니다. 카이스트는 고른기회전형의 정원을 매년 1%씩 높여 전교생의 10%까지 늘리려 합니다.” (카이스트의 고른기회전형 비율은 2022학년도 5.18%에서 2024학년도 6.32%로 늘었다.)

▷어떤 학생이 고른기회전형에 도전할 수 있나요.
“카이스트가 최초로 시도하는 또하나의 실험이 자녀가 셋 이상인 가정도 고른기회전형을 치를 수 있게 한 겁니다. 셋째가 태어나면 위의 두 형제·자매는 동생 덕에 고른기회전형으로 카이스트에 들어올 수 있는 겁니다. 올해 처음 21명이 입학했습니다.”

▷일반 전형으로 들어온 학생과 학력격차가 있을 것 같은데요.
“1학년 성적은 떨어지지만 졸업 성적은 비슷합니다. 이게 바로 교육의 성공이죠. 이처럼 가슴 뛰는 일이 어디 있어요. 어려운 환경에서 강한 정신력으로 꿋꿋하게 해 온 아이들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성공할 가능성도 더 높다고 봅니다.”



▷특혜나 불평등 시비가 있을 것 같은데요.
“저출생 문제는 나라가 살아남느냐 없어지느냐를 가르는 문제에요. ‘불평등, 특혜’라고 따지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다른 대학에도 전파돼야 할 일이에요.”(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도 이날 11일 카이스트의 다자녀 가정 고른기회전형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데 적극 협력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래도 사교육비 문제가 남는데요. 프랑스나 독일처럼 대학을 평준화하면 어떨까요.
“저도 프랑스에서 공부해 봤지만 대학을 평준화한 독일과 프랑스는 경쟁을 유지한 영미권에 비해 전반적으로 과학 수준이 떨어졌습니다. 최근 노벨상 수상자만 보더라도 영미권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참고할 사례가 있을까요.
“미국도 집이 잘 사는 학생일 수록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소득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카이스트를 방문한 MIT 학장은 ‘저소득층이나 중산층 학생들을 뽑아서 최상위권의 수입을 올리는 인재로 키우는게 MIT의 힘’이라고 하더군요. 카이스트도 MIT처럼 되려면 다양한 학생들을 많이 뽑아야 합니다. 대학은 경쟁을 통해 힘을 유지하면서 저소득층과 중산층 학생들이 고소득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외국인 인재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수한 학생들이 미국과 캐나다로 유학가는 이유는 현지에서 취직하고, 영주권과 국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시스템이 제대로 안 갖춰져 있습니다. 카이스트 학생의 10%(약 1000여명)가 외국인 유학생입니다. 지원자가 많아서 다 받지 못할 정도입니다. 이 친구들은 졸업하고도 한국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구체적인 방안이 있을까요.
“지난해부터 카이스트를 졸업한 외국인 학생에게 거주 비자를 주고, 취업을 돕고, 영주권도 빨리 받을 수 있게 하는 제도가 열렸습니다. 중국이 전세계 인재를 빨아들이는 ‘천인계획’을 했잖아요. 우리나라 대학들이 우수한 외국인 석박사 인력에게 매년 1000명씩만 국적이나 영주권을 주면 ‘한국판 천인계획’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좋은 대학에 가면 취업과 영주권 취득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나면 더 우수한 인력이 몰려와서 부족한 인력을 보충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선 우수한 학생들이 의대에 몰리는데요.
“보상 시스템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오랫 동안 의대 정원이 묶여 있다보니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연봉이 오를 수 밖에요. 정부가 공급을 늘렸으니 연봉은 곧 떨어질 겁니다. 하지만 정부가 간과하고 있는게 있습니다. 의대의 보상시스템이 강해지는 동안 이공계의 보상은 약해졌다는 점입니다.”

▷이공계 보상 시스템이 약해졌다고요.
“2005~2010년 스톡옵션을 무력화시키는 벤처기업 관련 세제 개편으로 이공계 학생들이 창업으로 큰 돈을 벌 수 있는 여건이 굉장히 안 좋아졌습니다. 합숙을 마다 않고 죽어라 연구한 끝에 받은 보상의 절반(45%)을 세금으로 내니 벤처를 하려는 학생이 줄 수 밖에요. 1990년대 정보기술(IT) 붐이 불었을 때 네이버 넥슨 다음 같은 스타 기업과 창업자가 쏟아져 나왔잖아요. 요즘 스타 기업, 스타 창업자가 뜸한 것도 이공계 인센티브가 줄어든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란 말이 있을 정도로 문과 외면도 심각합니다.
“인류의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큰 길의 방향은 인간에 대한 연구, 인문학적인 사상에서 정해집니다. 인문학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최전선에서 기술을 개발하는 카이스트 역시 어디를 향할 지에 대한 방향성은 인문학적인 연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어떤 연구를 해야 되지’에 대한 답은 10~20년 후 필요한 기술을 찾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20년 후에 인간이 원할 걸 찾아야 대박이 납니다. 그 답은 인문학에 있습니다. 20년 뒤라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요.”

▷문과 외면을 해소할 방법이 있을까요.
“기존의 인문학은 부가가치가 너무 적어서 시장에서 작동을 안합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데이터가 디지털 형태로 검퓨터 속에 들어있습니다. 카이스트는 디지털 인문학과라는 새로운 학과를 만들었습니다. 철학 역사학 전공자들에게 AI와 빅데이터를 가리켜 인공지능 전문 철학자, 역사학자가 되는 겁니다. 이런 학생들이 졸업하면 날개 돋칠 듯 팔릴 겁니다.”



▷우리나라 AI 경쟁력이이미 미국과 중국에 너무 뒤처져 버렸다는데요.
“인공지능(AI) 경쟁에서 뒤처지는 국가는 모든 것을 잃습니다. 일본 동남아 국가들처럼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나라들이 많습니다. 시장은 미국과 중국이 전부 다 먹게 생겼는데 어느 한 나라에 붙을 수는 없는 나라들입니다. 이 국가들과 'AI천하 삼분지계'를 짜야합니다. 그러면 빅테크들의 플랫폼을 쫓아갈 수 있습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문재인 대통령과 만나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인공지능(AI)”이라고 강조한게 2019년인데요. 딱히 변한 게 없어 보입니다.
“AI의 중요성은 30년 전 우리나라가 자동차, 조선, 제철산업을 키울 지 말 지 결정하는 것과 같아요. 정부가 방향이 맞는 회사를 한 두 곳을 골라 자동차 조선 철강업을 지원했듯이 와장창 조(兆) 단위로 지원해야 합니다.”

▷질문상, 헌혈왕 선발 등 여전히 엉뚱한 곳에 관심이 많습니다.
“AI의 시대에 인간이 AI와 경쟁해서 존엄성을 유지하려면 AI보다 잘하는 게 있어야 합니다. 창의력을 개발하는 겁니다. 창의력을 기르려면 질문하면 됩니다. 질문을 많이 하다보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거든요. 그래서 카이스트는 창의상 대신 질문상을 줍니다.”

▷우리나라는 왜 노벨상 수상자가 안나오나요.
“노벨상은 세상에 없는 걸 해야 받을 수 있어요. 산업을 키우는게 급했던 우리나라는 세상에 없는게 아니라 한국에 없는 걸 해야 했어요. 외국 것을 재빨리 한국화해 산업에 적용하는게 미덕이었죠. 덕분에 우리나라가 일어섰지만 노벨상의 철학과는 달랐죠. 최근 20년 사이 우리도 세상에 없는 걸 하자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곧 나올 겁니다.”



▷과학기술과 카이스트는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나요.
”지난 3월 카이스트의 아이디어 공모전 ‘크레이지 데이’에서 1등 당선작이 유산 방지 앱이었습니다. 스마트워치나 링의 센서를 통해 임산부의 건강상태를 모니터링하다가 이상이 생기면 휴식하도록 알려주는 앱입니다. 우리나라 여성의 3분의 1이 유산을 경험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과학기술은 임신과 출산, 그리고 태어난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도울 수 있습니다. 불임과 유산을 치료해 아이를 갖고 싶어도 못 갖는 가정을 도울 수 있습니다.”

▷육아에도 기여할 수 있을까요.
“초기 육아에서 가장 힘든 점이 아이를 재우는 일이잖아요. 아이를 토닥여서 통잠을 자게 만드는 인공지능(AI) 침대도 나올 수 있죠.”

▷고령화 시대에는 어떤 역할이 가능할까요.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걷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웨어러블 로봇 분야에서는 카이스트가 만든 회사 제품이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까지 받았습니다. 의료보험도 됩니다.”

▷급증하는 고령자 예산도 줄일 수 있겠군요
“노인들은 한 번 앓아눕기 시작하면 근육이 빠져서 못 일어납니다. 드러눕기 직전, 혹은 막 드러누웠을 때 웨어러블 로봇을 착용하면 혼자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간병인도 줄일 수 있죠.”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의 간병 로봇 시장은 걸음마 단계인데요.
“기초적인 기술은 카이스트도 다 갖고 있습니다. 상용화가 안된 건 수요와 시장을 만드는 컨트론 타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출산위원회가 컨트롤 타워 부처가 됐으니 카이스트 같은 대학에 ‘이런 기능을 가진 웨어러블 로봇을 2년내 개발해 주세요’라고 프로젝트를 주문하면 곧 상용화가 됩니다.”

▷일본을 쫓아갈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는 간병 로봇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기술을 주로 공장 자동화와 앱 제작에 썼던 겁니다. 정보기술(IT)은 우리가 앞서는 만큼 일본을 따라잡는 건 금방이에요.”

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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