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묘사한 공산사회의 목가적 일상이다. 꿈 같은 세상을 향한 70년 실험은 “빈곤의 평등”(고르바초프)으로 막 내렸다.
하이에크는 설계주의가 필패하는 이유로 치명적 자만을 꼽았다. 탁견이지만, 치명적 낭만도 빼놓을 수 없다. 사회주의 전체주의 포퓰리즘 같은 선동체제에선 늘 치사량의 낭만이 발견된다.
바로 그 망국적 ‘낭만 바이러스’가 한국을 덮쳤다. 엿새 전 ‘국회 기본사회 포럼’이 출범했다. 포럼 대표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기본사회를 “불안 없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나라”로 정의했다. 두 세기 전 불순한 이들이 그려낸 이상적 사회와 판박이다.
박주민은 ‘부족한 것은 재원 아닌 상상력과 용기’라고 했다. 위험천만한 용기다. 1인당 월 10만원 기본소득을 주는데도 올 국방비(59조원)와 맞먹는 60조원이 든다. 민주당이 목표하는 월 50만원 지급에는 연 300조원이 소요된다. 기본 금융·주택·의료·교육까지 챙기려면 글자 그대로 천문학적 돈이 필요하다.
현행 복지를 유지한 채 ‘기본 복지’를 추가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어불성설이다. 해법으로 들이민 대기업·부자 증세와 국채 발행은 실패한 ‘소득주도성장’을 꼭 빼닮은 방법론이다. 증세와 돈살포 규모가 소주성의 10배, 100배로 훨씬 대담하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기본 복지를 확충하면 소비 증가, 성장 촉진의 선순환이 뒤따를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착각이거나 위선이다. 인플레를 유발하고 성장을 갉아먹을 뿐이라는 점이 여실히 입증됐다.
기본소득파는 파죽지세다. 기본사회 포럼 참여 의원이 66명이다. 우원식 국회의장도 ‘국회 차원에서 적극 지지하겠다’며 목멘 축사를 했다. 당 대표 출사표에 ‘기본’을 17번 외친 이재명 후보는 경선 연설을 ‘기본사회’로 도배하며 90%대 열광적 지지를 확보 중이다.
낭만주의는 실로 유서 깊은 퇴행적 흐름이다.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 태동해 18~19세기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무한을 동경하고 초월적 세상을 상상하는 감수성 덕분에 초기엔 순항했지만 종국에는 유럽을 병들였다. 마약을 찬미하고 우생학적 경향마저 띠었다. 특히 독일의 낭만주의 경도가 남달랐다. 괴테가 “낭만주의는 독일인들의 질병”이라고 개탄할 정도였다.
당시 독일(프로이센)이 영·미에 뒤처진 것도 ‘자급자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정치경제학에 집착한 탓이 크다. ‘지체를 단번에 따라잡겠다’며 올인한 경제적 낭만주의의 결말은 더 큰 지체였다. 비현실적 목표 아래 사실보다 의지를 중시하고 과학적 팩트마저 거부한 데 따른 필연이었다. 나치즘도 ‘정치적 낭만주의 운동’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이성을 폐위시키고 인간을 동물화하며 권력욕을 찬미’한 나치즘은 낭만주의의 부정적 특질과 동일했다.
‘신이 내린 축복의 땅’ 중남미의 고난도 ‘낭만 질주’의 결과다. 낭만적 이미지로 각인된 쿠바 혁명은 깊은 상처와 열패감만 남겼다. ‘다 함께 잘살자’며 퍼주기로 치달은 아르헨티나 페로니즘과 베네수엘라 차비즘도 지옥도를 그렸다.
굳이 남미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문재인 정부도 ‘국민 삶을 책임지겠다’며 온정주의로 내달렸다. 10번의 추경으로 나랏빚을 401조원이나 폭증시키는 바람에 국채 이자만 연 30조원에 육박한다. ‘재난지원금으로 모처럼 소고기 한 근 샀다’는 댓글에 위정자가 “뭉클했다”고 자찬하는 새 벌어진 사달이다. 5년간 47조원의 사회적 비용을 야기한 ‘탈원전’ 역시 반과학적 생태낭만주의의 발로다. ‘탈탈원전’이 없었다면 48조원의 ‘체코 낭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재명식 낭만정책은 더 독하다. 속 보이는 ‘1인당 25만원’ 민생지원금을 기어이 감행할 태세다. 올 연구개발(R&D) 예산(21조9000억원)에 육박하는 18조원(최대)이 휘발되는데도 막무가내다. 기본소득도 본질은 반서민적이다. 빈곤층에 더 돌아가야 할 복지를 중산층 이상이 탈취하는 구조여서다.
때로 낭만은 자만보다 더 위험하다. 실패 시 자만은 변명이 어렵지만 낭만은 선의로 포장해 책임을 회피할 수 있어서다. 권력의 치명적 낭만 과잉이야말로 ‘기본 삶’의 주적이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