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일반 병원 30여군데에 지원했는데 단 두 곳 연락이 왔네요. 그마저도 면접에서 다 떨어졌어요."
서울 '빅 5'(서울대·연대 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병원) 수련병원에서 사직 처리된 2년 차 전공의 A씨는 "수련 과정 복귀는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일반 병원 구직도 하늘의 별 따기"라고 토로했다. A씨는 지난 3월 의사 면허가 정지된 뒤 주로 백화점 판매일과 식당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왔다.
그는 "최근 면허가 풀렸지만, 일반의 자리를 도저히 구할 수 없어 알바로 일본어 통역도 시작했다"며 "몇 달간 혼란을 겪으면서 연차랑 상관없이 주변 전공의 대부분 일반 병원 취업을 희망한다. 이제 서서히 면허 정지가 풀리고 있는데 다들 갑갑해한다"고 말했다.
의정 갈등 국면에서 무더기 사직 처리된 수련 병원 전공의들이 개원가로 쏟아져 나오면서 구직난을 겪고 있다. 이들은 피부과 등 미용 관련 일반 병원의 일반의 자리로 쏠리는 추세다. 일반의 취업을 포기한 이들은 아예 군 입대나 해외 유학 등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일반의 자리 구직 문의 10배 늘었다"
개원가로 쏟아진 사직 전공의 '구직난'
18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수련병원 151개 중 전날까지 사직 처리 결과를 제출한 110개 병원의 전공의 7648명(임용포기 포함)이 일괄 사직 처리됐다. 이는 올해 3월 말 기준 임용 대상자 1만3531명의 56.5%에 해당한다. 각 수련병원은 사직자 수를 약간 웃도는 총 7707명 정원으로 하반기 전공의 모집 절차를 시작한 상황이다.개원가로 쏟아진 사직 전공의 '구직난'
앞서 정부는 이번에 사직한 전공의에게 9월 복귀 특례를 제공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전공의 수련 중 사직할 경우 1년 이내 같은 진료 과목과 연차로 복귀가 불가능하다'는 기존 수련 지침에 특례를 적용하는 것이 골자다. 사직 전공의들의 하반기 모집 응시를 유도하는 유인책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직 전공의들이 수련 병원 복귀가 아니라 일반 병원 취업에 나서고 있다. 그 결과 개원가에선 뜻밖의 구직난이 발생하고 있다. 현행법상 전공의 전 단계인 의대 본과 6년, 인턴 1년을 마친 '일반의'는 일반 병원에서 진료를 보거나 직접 개원이 가능하다.
A씨는 "의사 전용 구인·구직 사이트나 커뮤니티에 올라온 구인 글을 보고 연락하면 '이미 뽑았다'란 얘기는 절대 안 한다. 일단 이력서를 달라고 해 보내면 아무런 소식이 없다"고 했다. 이어 "단기 아르바이트식이 아닌 이상 주변에서 일반 병원 취업에 성공한 선후배들은 보통 아는 사람을 통해 일자리를 구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고향인 광주광역시 내에 있는 병원에 구직할 생각도 있다"면서도 "다만 지방 병원은 채용 규모도 작고, 경력도 더 꼼꼼하게 본다고 해 아직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내과 일반의를 모집 중인 서울 성북구의 한 일반 병원 관계자는 "작년까지만 해도 채용 공고를 올려놓으면 한 달에 한두 명 정도만 연락이 와 사실상 '상시 채용'식이었다"며 "의사 파업 이후엔 최근까지도 전화와 문자 포함해 일주일에 최소 3명 이상은 구직 문의가 온다. 거의 10배가량 늘어난 셈"이라고 말했다.
특히 피부과, 성형외과 등 미용 관련 진료 분야에서 구직 열기가 유독 뜨거운 모양새다. 서울 중랑구의 한 피부과 사무장은 "최근 두 명의 피부과 일반의를 뽑는데 90명 가까이 전화가 와 놀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울 지역 수련병원 전공의 예비 1년 차였던 B씨는 "피부과 일반의는 보톡스, 제모 등 업무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또 아무래도 미용 계통 의료 시장이 가장 크지 않냐"며 "지금은 단기로 출장 건강검진일을 하고 있지만, 꾸준히 피부미용 쪽 병원 구직을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항래 대한피부과의사회장은 "원칙적으로 진료과목과 전공과목이 달라도 진료가 가능한 것은 맞다"며 "다만 사직 전공의가 대거 피부과, 성형외과 등 미용 병원으로 쏠리게 되면, 현재 문제가 되는 필수 의료 부족 문제가 개원가에서도 더 심화할 수도 있다. 향후 이들이 개원할 병원의 대다수도 결국 미용병원이지 않겠나"라고 우려했다.
갑자기 구직자 늘자 줄어드는 일반의 월급
'개업 목적' 전공의는 반토막나도 "상관 無"
개원가 구직 수요가 넘쳐나자 일부 병원에선 새로 채용한 일반의 월급을 낮추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같은 병원 소속이라도 경력, 분야에 따라 의사들마다 계약 상태가 다른 업계 관행에 따른 불가피한 일이란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개업 목적' 전공의는 반토막나도 "상관 無"
서울 시내 한 병원 사무장은 "병원 위치 등 변수가 있을 수 있지만 의사 두 명 이상 규모의 일반 병원에서 고용하는 3~5년 차 일반의는 보통 월 1000만원 전후의 월급을 받고 있다"며 "그런데 사직 전공의들이 개업가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같은 기준인데 월급을 200만~300만원가량 줄여서 계약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직 전공의 중 아예 개원을 생각하고 일을 배우려는 목적으로 일반 병원에 취업하는 경우엔 이보다 더 낮은 월급으로 계약하기도 한다"고 했다.
하다 하다 안되면 "그냥 군대나 해외 유학으로"
서울시의사회, 사직 전공의 취업 협의 시작해
구직에 실패한 사직 전공의 중에선 현역으로 입대를 하는 경우도 있다. 전남 소재 수련병원에서 사직한 전공의 C씨는 다음 달 육군 의무병으로 군에 입대한다. 그는 "벌써 6, 7월에도 동기 두 명이 각각 입대했다"며 "당장 일반 병원 취업이 어려운 상황이고, 이 사태도 언제 완벽히 해결될지 모르다 보니 붕 뜨는 시간에 차라리 군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고 말했다.서울시의사회, 사직 전공의 취업 협의 시작해
이어 "군의관이나 공중보건의는 복무 기간이 38개월로 너무 길고, 군의관이 '빅5' 병원으로 차출되는 것이 정부에 굴복하는 것 같이 느껴져 현역을 선택했다"며 "군에서 천천히 진로를 고민해볼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이밖에 미국, 호주 등 해외 유학을 고려해 미리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USMLE'(미국 의사면허 시험)을 준비하는 사직 전공의도 늘었다. 서울 지역 의대에서 사직한 전공의 D씨는 "USMLE를 준비하려면 보통 외국 자료를 봐야 하기 때문에 이를 준비하는 주변 선배들은 인터넷 강의와 함께 어학 공부에 열심"이라고 전했다.
한편, 서울시의사회는 현재 취업을 원하는 전공의와 개원의를 연계하는 구인·구직 게시판을 준비하고 있다. 또 24일엔 대한전공의협의회와 사직 전공의의 개원가 취업 관련 협의를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성진우 한경닷컴 기자 politpe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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