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내 아들한테 자식이 있었다고?"…비밀 드러나자 '발칵'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4-07-27 08:19   수정 2024-07-29 10:01



“제가 아드님이 생전 만나던 여자입니다. 아드님의 아들을 키우고 있어요.”

아들이 세상을 떠난 다음 날, 처음 보는 여자가 아기를 안고 불쑥 찾아와 들려준 이야기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들을 떠나보낸 슬픔마저 순간 잊을 정도로,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뭐? 내 아들이 자식이 있었다고? 그럼 이 아기가 내 손주란 말이야? 그런데 왜 그걸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아들은 과묵한 사람이었습니다. 매일같이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은 있느냐”고 물어봐도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던 아들. 그런데 사실은 자식까지 있었다니. ‘아무리 말이 없어도 그렇지, 매일 사이좋게 같이 밥을 먹었는데….’ 어머니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은 조르주 쇠라(1859~1891). 점묘법의 창시자이자 신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로서 한국 중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그는, 사실 자신의 어머니와 친구들에게 자식의 출산 소식조차 얘기하지 않을 정도로 비밀이 많은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새로운 길을 내다

미술에 관심이 없더라도 쇠라의 이름이나 점묘법이라는 기법을 한 번쯤 들어봤거나 그의 작품 이미지가 눈에 익은 분이 많을 겁니다. 그만큼 쇠라와 그가 남긴 작품들이 미술의 역사에서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반 고흐 등 비슷하게 유명한 다른 화가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편입니다. 생전 엄청나게 과묵했고 자신에 관한 기록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쇠라는 이런 성격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습니다. 법원 공무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는, 말수가 아주 적은 사람이었습니다. 가족과 따로 떨어진 별장에 살면서 일주일에 한 번밖에 집에 오지 않을 정도로 별난 점이 많았지요. 다만 부동산 투자로 돈을 꽤 많이 번 덕분에 가족에게 물질적인 지원은 아낌없이 해 줬습니다. 미술을 좋아해서 종교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쇠라를 아끼고 사랑해 줬습니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쇠라는 특별한 부족함 없이 여러 작품을 접하고 미술 교실에 다니며 화가의 꿈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열아홉 살이 되던 1878년, 쇠라는 프랑스의 명문 미술학교인 국립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합니다. 일반적인 천재들과 다르게 그의 성적은 의외로 중간 수준(80명 중 47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실력이 부족해서는 아니었습니다. 이 무렵 쇠라가 그린 훌륭한 흑백 드로잉들이 그 증거입니다.




성적이 좋지 않았던 건, 쇠라가 일찌감치 ‘자신만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것만 배워서는 나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그릴 수 없어.’ 그래서 그는 루브르박물관과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옛 거장들의 걸작을 익히고 최신 미술 이론을 공부했습니다. ‘나는 새로운 그림을 그릴 거야. 그래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어.’ 그는 생각했습니다. 스무 살 무렵의 청년이 꿀 법한, 실로 거창한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쇠라는 자신 있었습니다. 그에겐 충분한 재능과 젊음, 그리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끈기가 있었거든요.

학교에서 쌓은 공부를 재료로 삼아 1년간 바닷가에서 군 복무를 하며 생각을 정리한 그는, 스물한 살이 되던 1880년 스튜디오를 차려 독립했습니다. 그리고 4년 뒤인 스물다섯 살 때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작품을 발표합니다. 파리 교외 강변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을 그린 ‘아스니에르의 물놀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역사상 다른 화가들이 그렸던 작품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최고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전시 ‘살롱전’은 쇠라의 그림을 거부했습니다. 쇠라는 자신처럼 살롱전에 작품을 내지 못한 다른 작가들과 함께 ‘낙선전’에 작품을 냈습니다. 독창적이고 유망한 작가들의 작품이 많은 이곳에서도, 쇠라의 작품은 유독 특이했습니다.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이랬습니다. ‘이런 그림은 처음 본다.’ 그중 상당수는 조롱과 비난이었습니다. 하지만 눈이 밝은 소수의 사람은 깨달았습니다. 훗날 미술사에 남을, 뭔가 특별하고 대단한 일이 이 캔버스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요

점묘화의 탄생


쇠라의 깨달음은 과학적으로 분석한 ‘색’에 있었습니다. 물감은 섞을수록 짙고 어두워집니다(감산혼합). 좋아하는 예쁜 색깔의 물감을 모두 섞었더니 칙칙한 검은색이 돼서 속상했던, 어린 시절 미술 시간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쉽습니다. 반면 빛은 섞일수록 흰색에 가까워집니다(가산혼합). 그런데 사람은 빛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빛을 표현하고 싶어도, 화가가 쓸 수 있는 수단은 물감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빛의 느낌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요.



쇠라는 생각했습니다. ‘물감을 섞어서 캔버스에 칠하는 게 아니라, 캔버스에 칠한 물감들이 사람의 눈에서 섞이게 하면 되잖아.’ 그래서 쇠라는 아주 작은 붓질로 다양한 색을 칠해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냈습니다. 점묘법 기법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는 지금 기사가 띄워져 있는 전자기기 디스플레이의 기본 구성 요소, ‘픽셀’의 원리와도 같은 발상입니다.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보는 모니터나 휴대전화 등 디스플레이 장치는 무수히 많은 픽셀로 구성됩니다. 이 픽셀은 다시 빨강, 초록, 파랑의 작은 조각으로 나뉩니다. 이 조각들의 빛 세기를 각각 적절하게 조절하면 색깔이 표현되고, 이 픽셀이 모여서 전체 화면을 만들게 됩니다. 쇠라는 이런 원리를 일찌감치 떠올렸습니다. 당시 인간의 시각과 색에 대한 최신 과학을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생각이었습니다.



쇠라의 생각이 완전히 옳은 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쇠라가 쓰는 것도 빛이 아닌 물감.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색을 잘게 섞는다고 해도 쇠라의 생각처럼 밝아지지는 않습니다. 붓질도 더 세밀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만들어낸 색채는 새로웠고, 풍부하고 신선하면서도 깨끗한 느낌은 빛의 한 측면을 훌륭하게 표현해낼 수 있었습니다. 용기를 낸 쇠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걸작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2년이라는 시간을 쏟아 그린 쇠라의 대표작,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1884~1886)였습니다.



그랑자트 섬은 우리로 치면 여의도 한강공원과도 같은, 파리 센강의 공원 같은 섬. 사람들은 주말이면 이곳으로 소풍을 나와 휴식을 취하곤 했지요. 쇠라는 이곳에 매일 출근해 풍경과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수십 개에 달하는 스케치를 그렸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수십 명의 등장인물을 포착했고, 이들을 영원히 시간이 멈춘 듯한 구도로 배치했습니다. 이런 특유의 신비로운 구도는 ‘미술 역사에 남을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는 목표 때문이었습니다. ‘영원히 남을 그림을 그리려면 인상주의처럼 곧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가벼운 붓질로는 안 돼. 좀 더 단단하게, 이 순간을 영원히 그림에 담았다는 느낌을 줘야겠어.’ 쇠라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일 리 없었습니다. 쇠라는 2년의 세월 동안 오직 그림에만 몰두했습니다. 오전 시간 그랑자트 섬에서 사람들을 스케치한 그는 친한 친구들이 점심을 먹자고 해도 뿌리치고 스튜디오로 돌아가 빵으로 대충 끼니를 때운 뒤 그림 구도를 구상하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조명 아래에서 그리면 색감을 제대로 알 수 없어서 그림을 망친다’는 동료 화가들과 달리, 밤에도 어두운 조명 아래서 쇠라는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자신이 그리는 그림 속 색과 형태를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한 ‘설계도’를 머릿속에 넣고 있었기에, 그만큼 그림에만 집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쉬지 않고 작업해도 그림은 좀처럼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쇠라가 그린 작품은 세로가 2m, 가로가 3m 넘는 대작입니다. 사람들이 전체 그림의 모습을 한눈에 보기 위해, 멀리서 그림을 보게 하려는 치밀한 설계였습니다. 이렇게 떨어져서 쇠라의 작품을 보면 점 하나하나를 구분할 수 없고, 쇠라가 의도했던 ‘눈에서 색이 섞이는’ 효과가 발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만큼 쇠라가 찍어야 할 점은 많고도 많았습니다.

쇠라는 묵묵히 점을 찍고 또 찍었습니다. 점을 찍는 과정에서도 좋은 소재를 발견하거나 생각이 바뀌면 여러 번 구도를 변경했습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 작품 속에 있는 점은 총 22만개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쇠라가 이를 위해 만든 습작까지 합하면, 그가 찍은 점의 총 수는 백만 개가 훨씬 넘을 겁니다.

쇠라가 무수히 많은 점을 찍으며 했을 생각을 감히 가늠하기는 어렵습니다. ‘위대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환희에 젖었을까요. 그보다는 괴롭고 힘든 시간이 더 많았겠지요. 어쨌거나 시간은 흘러갔고, 마침내 쇠라는 작품의 마지막 점을 찍었습니다. 첫 점을 찍었을 때 스물다섯 살이던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이 돼 있었습니다

말 없는 젊은이

그가 1886년 인상주의 전시에 출품한 이 작품은 예상대로 미술계를 뒤흔들었습니다. 칭찬보다는 비판이 더 많았습니다. 평범한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도가 지나치게 단순하고 경직돼 있다.” “그림을 덮고 있는 색색의 벼룩을 벗겨내면 그 밑에는 생각도 영혼도 없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더욱 격렬한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르누아르는 말했습니다. “쇠라의 작품은 예술이 아니라 과학이야. 아무리 과학을 들이대봤자 예술을 따라잡을 수는 없어. 예술에는 공식이 없거든.” 하지만 이런 신경질적인 반응은 역설적으로 쇠라 작품의 중요성을 잘 드러내는 반응이기도 했습니다. 거장들의 본능은 말하고 있었습니다. 쇠라의 작품이 ‘기존 인상주의에 대한 도전장’이자, 미술 역사에 남을 만한 잠재력이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는 사실을요.




기존 인상주의 화가들의 목표는 경쾌한 붓질과 다양한 색으로 빛의 작용에 따라 순간순간 달라지는 세상의 모습을 잡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는 그림이 다소 산만해지고 가벼워진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쇠라는 거기에 ‘질서정연한 영원함’을 더하려고 했습니다. 새파란 젊은이가 ‘당신들 작품에 있는 문제점을 내가 보완했다’는 듯한 그림을 들고나왔고, 그게 말이 되니, 인상주의 화가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이해할 만했습니다. 쇠라의 화풍에 신인상주의(Neo-impressionism)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반면 새로운 세대의 화가들은 쇠라의 화풍에 열광했습니다. 반 고흐는 1888년 쇠라의 스튜디오를 방문했고, 실제로 자기 작품에 점묘법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펠릭스 페네옹을 비롯한 일부 평론가들도 쇠라의 작품을 이해하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 거대한 그림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대담하고 새롭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렇게 미술계에 난리가 났는데도, 여전히 쇠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삶을 바라보고, 감각을 느끼고, 그걸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기쁨과 고통은 충분하다.” 쇠라가 말을 많이 할 때는 오직 자신의 작품과 그 속에 숨겨진 이론을 설명할 때뿐이었습니다. 한 친구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작품을 설명할 때 쇠라의 눈은 빛났습니다. 느리고 차분한 말투, 신중한 제스처로 쇠라는 자신이 이룩한 업적을 친절하게 설명했습니다. 쇠라는 매우 겸손하고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쇠라의 작품 설명을 듣다 보면, 그가 말을 하지는 않아도 자기 작품과 성취에 대해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쇠라의 생각대로 이 작품은 미술사에 영원히 남았습니다.

젊은 날을 작품에 몰두해 보냈고 큰 성취를 거뒀으니 잠시 휴식을 취할 법도 한데, 그는 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조바심을 냈다”(폴 시냑)는 게 친구들과 동료들의 기록입니다. 점묘법이라는 자신의 혁신적인 생각과 기법이 이제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니,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따라잡기도 쉬워졌다는 두려움이 생겨서였습니다. “기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개성이 중요하고, 쇠라의 개성은 그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것”(카미유 피사로)이라고 타일러도 쇠라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쇠라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그의 작품 중 똑같은 그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쇠라가 점을 찍을수록 그의 예술세계는 수직의 구도에서 벗어나 수평으로, 대각선으로 대담하고 자유롭게 뻗어나갔습니다. 하지만 그가 찍는 점은 스스로의 몸과 마음이 재료였습니다. 쇠라의 건강은 계속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1880년대 후반 친구(폴 시냑)에게 보낸 편지에는 몇 안 되는 그의 솔직한 심정이 드러납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모두 얼룩일 뿐이고 지루한 작업일 뿐.”

친한 친구에게도 결코 마음을 열지 않고 개인적인 이야기도 거의 하지 않던 그가, 이 무렵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된 건 기댈 곳이 필요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들렌 노블로흐(1868~1903). 쇠라는 생전 부모님과 친구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녀의 존재를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890년 아들을 낳은 후에도 그랬습니다. 대체 왜 그랬을까요? 아들을 낳고 자리를 잡으면 발표하려고 했던 걸까요, 영원히 숨기려고 했던 걸까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쇠라가 그린 연인의 그림을 보면,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입니다. 비록 예쁘게 미화해 그리진 않았지만, 부드러운 색채가 마치 봄바람 같은 느낌을 주거든요.

그리고 쇠라의 작품은 또 한 번 크게 변합니다. 서른두 살이던 1891년 전시에 출품한 ‘서커스’는 대각선과 원, 곡선 등 여러 구도가 어우러진 그림입니다. 그의 그림에 없었던 단 하나, ‘역동성’이 등장한 순간이었습니다.



쇠라를 좋아하세요?

하지만 막 하늘로 날아오르려던 그 순간 쇠라의 날개는 안타깝게도 꺾이고 맙니다. 그가 전시 시작 직후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에 걸렸고, 고열로 쓰러져 불과 3일 만에 허망하게 세상을 등진 겁니다. 그의 나이 서른둘이었습니다.
갓 돌을 넘긴 쇠라의 아들도 불과 보름 뒤 같은 병으로 아빠를 따라갔습니다. 쇠라의 연인이었던 마들렌 노블로흐는 별다른 말도, 기록도 남기지 않고 10여년 후 세상을 떴습니다. 쇠라처럼 말이 없었던 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로 쇠라에 관한 이야기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쇠라가 남긴 이야기와 작품은 세상에 별로 남지 않게 돼버렸습니다. 활동 기간은 불과 10년 정도에 불과하고, 완성한 작품 수도 많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색이 바랬습니다.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의 첫 전시 때 작품을 봤던 평론가들은 10년 후 작품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빨간색과 파란색은 유지됐지만 녹색은 올리브색으로 변했고 빛을 발하던 주황색은 이제 구멍만 남았다.”(펠릭스 페네옹) 당시 기술의 한계로 불안정한 물감을 썼기 때문에, 작가가 의도한 색 중 상당 부분이 변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기록도 없고 색도 변했는데 쇠라의 작품을 칭송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졌습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 초대 관장인 알프레드 바는 1929년 미술관이 문을 열 때 딱 네 명의 화가를 콕 집어 ‘그들에게 이 미술관을 헌정한다’고 했습니다. 세잔, 고갱, 고흐, 그리고 쇠라였습니다. 지금도 미술사에서 쇠라의 자리는 굳건합니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대중적인 인기까지 누리고 있습니다.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는 대중문화에서 수없이 패러디됐고, 시카고미술관을 비롯한 각국 미술관에 있는 그의 작품 앞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람객들로 연일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술사학자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댑니다. 거대한 크기, 점묘화라는 독특한 기법, 다양한 등장인물을 특유의 매력으로 질서정연하게 녹여낸 안정적인 구성, 그림에 녹아 있는 당시 파리의 시대상과 중산층의 생활사, 이로 인한 미술사적인 중요성…. 비싼 가격으로 인한 화제성, 뭘 하는지 알 수 없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자아내는 흥미로운 수수께끼, 대중문화에 자주 등장해 익숙하다는 점 등 좀 더 현실적인 이유를 꼽을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작가의 성실함, 비극적인 최후, 계속 살았다면 더 위대한 작품을 볼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처럼 작가의 삶에서 이유를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이런 점들을 잘 모르는 사람 중에서도 쇠라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가 많거든요.

사람들이 쇠라를 좋아하는 이유를 추측하는 건, 그래서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객 각자의 몫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쇠라의 인기는 앞서 말한 이 모든 이유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뭔가를 사랑할 때 그렇듯이. 몇 가지 이유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그 모든 감정과 사소한 사랑의 원천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표현할 수는 없는 것처럼. 가까이서 하나하나 보면 무의미해 보이고 좀처럼 인식할 수 없는 쇠라의 점들이 모여 아름답고 거대한 작품을 만들듯이, 어떤 존재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 셀 수 없이 많은 점만큼이나 많을 수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쇠라가 캔버스를 통해 보여주는 빛이자, 미술의 매력이 아닐까요.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i>**이번 기사는 Seurat: A Biography(John Rewald 지음), Seurat and La Grande Jatte(Robert L. Herbert 지음), Seurat (Pierre Courthion 지음), Seurat(John Russell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이 2022년 7월 연재를 시작한 후 2주년을 맞았습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 보내주신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힘껏 쓰겠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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