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4년 1월이 끝나갈 무렵, 벽난로 옆에서 한 남성이 불에 타 죽은 채 발견됐다. 남성의 이름은 다미앙 드 고이스(1502~1574). 포르투갈 왕립 기록물 보관소장이던 그는 역사가이자 철학자였다. 시신의 손엔 반쯤 타다 만 문서 조각이 쥐여 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선임연구원인 에드워드 윌슨 리가 쓴 <물의 시대>는 실제 역사적 인물인 다미앙의 기묘한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한 시대 지식인의 죽음 뒤에 숨은 진실을 추적하기 위해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의 모습을 꼼꼼히 그려 나간다. 한편의 추리소설처럼 진행되는 서사 전개 방식이 흥미롭다.
포르투갈 왕국의 기록물 보관소가 보유한 기록은 단순한 문서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16세기 내내 유럽과 바깥 세계를 연결하는 주요 관문 역할을 한 포르투갈은 이곳에 모든 나라의 기록을 저장해뒀다. 정보는 곧 권력을 뜻했다.
기록물 보관소에 쌓인 수많은 문서를 관리하고 정리해 왕국의 공식 연대기를 편찬하는 일이 다미앙의 업무였다. 그는 먼저 마누엘 1세 통치기 역사를 쓰는 일을 맡았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해, 중국과의 첫 접촉, 기독교의 승리 등을 통해 왕국의 부와 위상이 어마어마하게 성장한 시기였다.
보관소에 쌓인 자료들을 정리하던 다미앙은 다른 목소리가 담긴 역사를 발견했다. 동양의 문명이 서양의 문명을 능가한다고 기록된 수기 원고, 기독교로 억지로 개종당한 식민지 백성의 기록 등이다. 다미앙은 이 같은 목소리도 빼놓지 않고 역사에 포함했다. 동시에 당시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이 갖고 있던 우월적 승리주의를 해체하고자 시도했다. 예컨대 다미앙은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에 관한 기록을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다.
“많은 포르투갈인이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최초로 이 항로를 항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뱃길은 그저 오랫동안 인류에게 잊혔던 길일 뿐이다.”
다미앙의 이야기와 교차되면서 소개되는 또 다른 인물은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으로 칭송받는 루이스 드 카몽이스(1524~1580)다. 카몽이스가 쓴 민족적 서사시 ‘루지아다스’는 포르투갈의 해상 발견과 영토 확장 과정을 배경으로 한다. 시에서 그는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 이야기를, 보물을 찾아 동방을 탐험하는 영웅인 이아손과 아르고호 원정대 이야기로 변모시키며 포르투갈과 유럽인을 세계의 중심에 세웠다.
카몽이스의 작품이 남다른 명성을 얻게 된 배경엔 당시 포르투갈과 유럽이 느끼던 위기감이 자리잡고 있다. 다미앙을 비롯해 왕실과 제국의 권위에 의문을 품는 지식인이 점차 생겨나던 시기였다. 세계 역사의 중심이 예루살렘과 로마라는 신념이 무너지고, 유럽이 로마 제국 유산의 상속자란 주장마저 수많은 경쟁자의 도전을 받았다. ‘야만적인 이방인에게 맞서는 유럽인’이란 서사에 흠집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다미앙과 카몽이스는 각각 다른 운명을 맞았다. 카몽이스가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은 반면 다미앙은 왕실과 지배세력으로부터 미움과 지탄을 받게 되면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두 사람의 대조적인 결말을 통해 저자는 역사의 폭력성과 문화적 폐쇄성의 위험함을 꼬집는다.
서양 중심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전통을 비판하고,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을 경계한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