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좋은 전통이 있다. 어떤 사건이 터지면 꼭 그와 관련한 책이 나온다는 점이다. 그것도 사건 진행을 나열하기만 하는 건조한 책이 아니라 관련자를 인터뷰하고 행적을 추적해 드라마처럼 생생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고잉 인피니트>도 그런 전통을 따른 책이다. 코인 거래소 FTX를 세워 한때 개인 재산이 약 31조원에 달했지만 사기 행위로 몰락한 샘 뱅크먼프리드(일명 SBF)를 다뤘다. 이제는 이 분야에서 거장의 반열에 오른 마이클 루이스가 썼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미리 위험을 포착한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빅 숏’으로 유명한 논픽션 작가다. ‘머니볼’ ‘블라인드 사이드’ ‘플래시 보이즈’ ‘다섯 번째 위험’ 등 전작에서 그는 우리가 잘 몰랐던 세상을 들춰보며, 그 안에서 활약한 숨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쩌면 <고잉 인피니트>도 한 젊은 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루이스는 2021년 말 처음 SBF에 대해 들었다. 한 지인이 SBF의 회사와 수억달러 규모 거래를 하려는데, SBF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 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SBF를 만나본 뒤 루이스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당장 샘 뱅크먼프리드와 주식을 교환해도 되겠습니다! 샘이 원하는 일은 다 해주세요! 잘못될 일이 뭐가 있겠어요?”
SBF에 매료된 루이스는 그에 대한 전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밀착 취재가 시작됐다. FTX 본사가 있는 바하마(카리브해에 있는 섬나라)에서 몇 달을 같이 지내기도 했다. 그 결과 SBF에 관한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 완성됐다. 비판을 받기도 한다. 범죄자인 SBF를 너무 우호적으로 그린 것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책에서 SBF는 괴짜지만 세상을 바꿀 천재성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초합리성’을 내세운다. 사람을 ‘좋다’ ‘나쁘다’로 판단하지 않고 평균을 중심으로 한 확률 분포로 본다. 언론과 화상 인터뷰를 할 때 그의 눈빛은 마구 흔들린다. 불안해서가 아니다. 인터뷰 도중 비디오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돈이 많았지만 호화로운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자신이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이유는 지구를 구하는 일에 돈을 쓰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도널드 트럼프가 민주주의에 가하는 위협을 걱정해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를 만나 반(反)트럼프 정치인들을 후원하고 싶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그는 예술에 감동하지 않았고 셰익스피어를 경멸했다. 비현실적인 캐릭터, 비논리적인 줄거리가 이유였다. ‘인간성’에 호기심을 느끼고 탐구했지만 개인에 대해선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는 ‘책임을 진다’는 개념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과실은 인간 사회를 이루는 구성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SBF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책은 월터 아이작슨이 쓴 <스티브 잡스>처럼 됐을지 모른다. 혹은 사기 행위를 인지하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면 테라노스 창업자 엘리자베스 홈스를 다룬 <배드 블러드> 같은 책이 됐을 것이다. <고잉 인피니트>는 영웅 이야기를 쓰려다 범죄자 이야기로 바뀐 혼란이 책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루이스는 SBF가 법을 어기긴 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며, 일부러 그런 일을 저지르진 않았을 거라고 본다. 고객 돈을 마음대로 가져다 쓴 것은 분명 잘못했지만, 그 돈을 날린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공지능(AI) 업체 앤스로픽에 지분 투자한 돈 등 FTX가 보유한 비유동자산을 팔면 모든 고객에게 원금에 이자까지 더해 돌려줄 수 있다는 것이다.
2022년 12월 법원은 SBF에 징역 25년형을 선고했다. 판사는 그가 ‘위험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동전 던지기를 해서 뒷면이 나오면 세계가 멸망하고, 앞면이 나오면 세계의 선(善)이 2배로 증가할 때 그는 기꺼이 동전을 던질 사람이다.
논란이 있는 책이지만 매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저자의 솜씨는 여전히 빛을 발한다. SBF 같은 사람이 또 세상에 나타날 가능성은 크다. 책은 이런 인물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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