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면 죽는 병'.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증에 대한 대표적 편견이다.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그룹 퀸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HIV에 감염되던 1980년대만 해도 이 질환은 극복 불가능한 병이었다. 하지만 의학기술이 발전해 이젠 평생 약을 먹으면서 만성질환처럼 관리하는 시대가 됐다.
최근 HIV 치료에 또다른 전환점이 될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독일 베를린에서 세포 이식 치료를 받은 HIV 환자가 완치하면서다. 에이즈 증상이 1981년 처음 보고된 뒤 40여년 간 완치 사례는 이 환자를 포함해 일곱명 뿐이다.
'베를린 환자'로 보고된 60세 환자는 2009년 HIV 진단을 받았다. 2015년 이 환자가 급성 골수성 백혈병(AML)까지 진단 받자 의료진은 혈액을 만드는 줄기세포인 조혈모세포 이식을 결정했다.
HIV는 면역세포 표면에 있는 특정 수용체(CCR5)를 활용해 침투한다. 이렇게 많은 면역세포를 감염시켜 제 기능을 못하도록 한다.
HIV가 활용하는 CCR에 델타-32 결손 돌연변이가 있으면 HIV는 세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세포에 HIV 유전자를 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HIV 감염에 대해서도 면역이 생긴다. CCR 델타-32 돌연변이를 한쌍 보유한 기증자의 조혈모세포를 환자에게 이식하면 암과 HIV를 함께 치료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방식의 첫 완치 사례가 의학계에 정식으로 보고된 것은 2009년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신(NEJM)을 통해서다.
'첫 베를린 환자'로 기록된 티모시 레이 브라운은 1995년 HIV 감염 후 2006년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이듬해 CCR 델타-32 돌연변이를 가진 기증자의 조혈모세포를 이식받았다. 이후 HIV 치료제인 항레트로바이러스제도 끊었지만 HIV는 몸 속에서 사라졌다.
브라운은 2020년 백혈병이 재발해 세상을 떠났지만 첫 HIV 완치 환자로 기록됐다. 이후 영국, 미국 등에서 HIV 감염 후 백혈병이 생긴 환자들에게 비슷한 치료가 시행됐다.
기존 환자 중 5명은 CCR 델타-32 돌연변이를 한 쌍 가진 기증자의 조혈모세포를 이식 받았다. 여섯번째 환자인 '제네바 환자'는 CCR 델타-32 돌연변이가 없는 기증자의 조혈모세포를 이식 받았지만 추적기간이 20개월에 불과해 아직 HIV 완치 판정을 내리기엔 부족하다는 평가다.
일곱번째 환자는 2015년 CCR 델타-32 돌연변이를 하나만 보유한 기증자의 세포를 이식받았다. CCR 델타-32 돌연변이를 한쌍 가진 기증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환자는 원래 CCR 델타-32 돌연변이를 하나 보유하고 있었다. 부모 중 한명에게만 CCR 델타-32 돌연변이를 물려받았다는 의미다. 환자는 2018년 HIV 약을 끊었지만 지금까지 HIV는 재발하지 않았다.
HIV에 대한 면역은 CCR 델타-32 돌연변이를 한쌍 보유할 때만 생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환자에게 조혈모세포를 기증한 사람은 물론 환자도 HIV에 대한 면역이 없었다는 의미다.
크리스티안 게이블러 베를린대 샤리테병원 교수는 "그동안 HIV 면역이 없는 기증자 세포를 이식했을 땐 몇달 뒤 HIV가 다시 활성화됐다"며 "일곱번째 환자는 기증자의 세포가 면역체계를 대체해 HIV가 숨은 곳을 모두 파괴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항레트로바이러스제를 투여하면 몸 속 HIV 숫자가 크게 줄어든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위해선 환자의 몸 속 면역세포를 없앤 뒤 기증자의 세포를 넣어준다. 이 때 새로 들어간 기증자 세포가 남아있는 환자 세포를 적군으로 인식해 HIV까지 함께 죽였을 수 있다고 의학계에선 설명했다.
일곱번째 환자가 원래 CCR 델타-32 돌연변이를 하나 가지고 있었던 게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환자가 가진 CCR 델타-32 돌연변이에, 기증자의 CCR 델타-32 돌연변이까지 더해져 HIV가 세포 안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추가 장벽을 쌓았다는 것이다.
유럽인 중 CCR 델타-32 돌연변이를 한쌍 보유한 사람은 1% 정도다. 이를 하나만 보유한 사람은 16%에 이른다. CCR 델타-32 돌연변이를 하나만 보유한 기증자의 조혈모세포도 효과 있다는 게 밝혀지면 이식이 더 활발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다만 건강한 기증자의 조혈모세포를 HIV 환자에게 이식하는 치료는 상당히 부담이 크다. 시술 전 환자 몸 속 면역세포를 모두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HIV 감염 후 백혈병이 생긴 환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시행하는 이유다.
이 때문에 최근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등을 활용해 HIV 환자의 몸 속 CCR 유전자를 잘라내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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