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출입은행 직원들은 요즘 창사 이래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정부의 ‘수출 증대를 통한 경제 회복’ 방침에 따라 글로벌 수주 전쟁의 최전선에 서 있어서다. 지난 6월 사상 첫 KTX 수출(우즈베키스탄)에 이어 4000억코루나(약 24조원) 규모의 체코 원전 수출 등 잇따라 대박을 터뜨리는 과정마다 수은이 금융 지원을 도맡았다. 이 같은 수은의 광폭 행보 중심엔 윤희성 수은 행장이 있다. 취임 2주년(27일)을 앞둔 지난 19일 서울 여의도 수은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윤 행장은 체코 원전 수주 얘기부터 꺼냈다. 그는 “체코가 한국에 원전을 발주한 배경에는 K제조업의 경쟁력이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원전 부품·기자재 업체들이 현지에 함께 진출하면 체코의 산업 생태계를 발전시켜줄 것이란 기대가 깔려 있다는 게 윤 행장의 생각이다. 윤 행장은 “글로벌 무역 기조가 자유무역에서 자국 우선주의로 바뀌면서 국가의 총체적 역량이 수출에 기여하는 시대가 됐다”며 “수은은 정부 부처 및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수출 역량 강화에 온 힘을 쏟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체코 원전 수주 과정에서 수은은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체코 에너지안보특사와 관련 인사들에게 금융 지원 방안을 적극 소개했습니다. 특히 ‘팀 코리아’가 이뤄낸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사업 수행 성과를 강조했죠. 수은은 국내 금융기관 중 유일하게 바라카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체코가 사업 초기에는 자체 재정으로 재원을 조달할 수도 있지만, 추가 발주에선 금융 지원을 요청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팀 코리아가 경쟁력 있는 금융 지원까지 옵션으로 갖췄다는 점은 앞으로 다른 대형 수주 경쟁에서도 유리하게 작용할 겁니다.”
▷원전 추가 수주를 예상하시나요.
“유럽연합(EU)은 탄소중립을 위한 택소노미(녹색분류체계)에 원전을 넣었습니다. 러시아 가스에 대한 의존도도 줄여야 하고요. 체코 인근 중부 유럽 국가에서 원전 발주가 나올 겁니다. 유럽의 강자인 프랑스전력공사(EDF)가 상당한 물량을 가져가겠지만 한국에도 분명히 기회가 있을 겁니다. 프랑스가 러시아와 가깝다는 점도 체코가 한국을 택한 이유로 보입니다. 이번 체코 원전 수주는 주변국 물량을 추가로 확보하는 강력한 교두보 역할을 할 겁니다.”
▷원전 수주 이후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한국의 자동차와 2차전지 기업들이 중부 유럽에 산업 생태계를 구축했습니다. 한국 기업의 현지 공략을 확대하는 동시에 상대국의 제조업 역량을 끌어올리는 ‘윈윈’ 효과를 내고 있죠. 이번 원전 수주로 한국 업체가 진출하면 원전 생태계가 구축될 겁니다. 폴란드 방산 수출을 계기로 방산 인프라도 조성되고 있고요. 한국의 수주 경쟁력이 더 높아지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겁니다. 수은은 올 하반기 폴란드 사무소를 개설합니다. 방산과 원전 등 대형 전략 수주를 지원하는 동시에 한국 기업들이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에 참여할 때 전초기지 역할을 할 겁니다.”
▷2009년 UAE 원전 수주 당시 수은의 대출 조건이 불리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대출 금리가 수은의 조달 금리보다 높았기 때문에 손실이 나지 않는 구조였습니다. UAE의 국가신용등급이 한국보다 높아서 ‘수은이 비싸게 빌려서 싸게 빌려줬다’는 식의 오해가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대출 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수출신용협약이 정한 기준보다 높았습니다. 만기 27년이 너무 길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원전 건설 기간이 통상 10년 안팎이라는 점에서 원전 수출금융의 일반적 기간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공급망안정화기금이 곧 출범한다고 들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과열되는 가운데 각지에서 전쟁이 터지며 원재료와 중간재 수급 불안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중국의 요소수 수출 제한으로 홍역을 치르기도 했죠. 미국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 각국의 자국 우선주의는 더 가속화할 겁니다. 중국 같은 자원 부국은 수출 통제를 강화할 거고요.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더 커진다는 의미죠. 공급망안정화기금은 다음달 5조원 규모로 출범합니다. 내년부터는 연간 최대 10조원으로 확대될 예정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운용됩니까.
“정부가 보증하는 채권을 수은이 발행해 재원을 조달합니다. 지원 형태는 직접 투자부터 융자까지 다양합니다. 공급망안정화법에 따라 지정된 핵심 물자가 대상입니다. 광물에만 한정되는 건 아니고요. 2차전지, 반도체 같은 첨단 전략제품이나 식량도 가능합니다. 애그플레이션(곡물 가격 상승)에 선제적으로 대비할 수도 있죠. 물자 확보부터 시설 투자, 관련 기술 도입, 물류 인프라 구축 등 공급망의 단계별 기업들이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수은이 기금 운용사로 선정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2차전지 소재로 주목받는 흑연을 봅시다. 현재 전 세계 기업들이 중국에 의존하고 있죠. 아프리카의 모잠비크가 흑연 매장량이 많기 때문에 각국이 진출을 서두르는 상황입니다. 모잠비크 입장에서 어느 국가 또는 기업에 채굴권을 줄까요. 수출용 항만이나 항만에서 광산을 잇는 도로를 지어주는 국가를 찾겠죠. 의료나 교육 인프라를 구축해 주면 채굴권 확보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겁니다. 수은은 개발도상국 인프라 유상원조자금인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전담운용기관이기도 합니다. 우리 기업들이 공급망 재편 사업을 시도할 때 수은이 패키지 금융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른바 ‘전략적 수주’를 준비하는 건가요.
“대형 프로젝트 수주는 국가대항전입니다. 개별 기업이 아니라 국가 단위로 뛰어야 합니다. 큰 일감을 주는 입장에선 뭔가 받는 것도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첫 KTX 수출이 그런 전략적 수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분당서울대병원이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한국형 종합병원을 세우고 의료 기술을 전수하기로 했습니다. 그 사업비를 수은이 EDCF로 지원합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고속철 사업을 주는 대신 최신 의료 인프라를 받아냈다고 생각하겠죠. 상대국에 이익을 줘야 우리도 이익을 볼 수 있습니다.”
▷수은의 역할도 달라져야겠습니다.
“일본의 수출입은행은 1999년 해외경제협력기금과 통합하면서 이름을 국제협력은행으로 바꿨습니다. 인류 평화와 번영을 지원한다는 목표를 내세우고 있는데요. 쉽게 말하면 ‘자국의 이익을 세련되게 추구하겠다’는 겁니다. 수은도 이제는 수출금융 이상의 기능을 해야 합니다. 상대국과 우리가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가 되도록 수은이 동반자 역할을 할 겁니다.”
이창용 한은 총재와 대학동기…尹대통령과는 '독서실 동기'
윤 행장은 수은의 법정자본금이 15조원에서 25조원으로 늘어난 것을 임기 중 가장 의미 있는 성과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수은의 수출 지원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공감대 아래 여야는 지난 2월 수은법을 개정했다. 수은 법정자본금이 늘어난 건 2014년 이후 10년 만이다.
윤 행장은 “모든 성과는 은행 후배들 덕분”이라고 했다. 그는 직원들의 면담 요청을 대부분 수용한다. 크고 작은 내부 모임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소통을 중요하게 여겨서다.
윤 행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80학번으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조동철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은성수 전 금융위원장 등과 동기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법대 82학번)과는 영어 회화 동아리 활동을 함께한 인연이 있다. 윤 행장은 수은 입행 전 집 근처인 서울 서교동 독서실에서 행정고시를 준비했다. 당시 같은 독서실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친분을 맺었다. 두 사람은 이후 별다른 교류 없이 지냈다고 한다. 최근에는 윤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갈 때 윤 행장이 수행단으로 동행하는 정도의 만남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 약력
△1961년 부산 출생
△1980년 휘문고 졸업
△1984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86년 서울대 행정학 석사
△1988년 한국수출입은행 입행
△2015년 자금시장단장
△2019년 혁신성장금융본부장
△2021년 우리금융캐피탈 사외이사
△2022년 7월~ 수은 행장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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