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밥값을 책정하는 법

입력 2024-07-30 17:37   수정 2024-07-31 01:26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과 이른바 스몰 토크를 할 때면 날씨 얘기만큼이나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주말엔 뭐 하세요’라는 질문이다.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대극장이든 소극장이든 다양한 공연을 보면서 주말 반나절을 오롯이 자신에게 투자하기 시작한 지 몇 개월 된 것 같다. 직장인의 역할도, 수험생 엄마의 역할도 잠시 내려놓는 소소한 일탈을 하기 위해 마음에 드는 공연이라면 이른바 피케팅이나 n차 관람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느 날 버스 정류장에 붙어 있는 연극 햄릿의 광고를 보고, 연극계의 내로라하는 원로 배우들이 출연한다는데 수십 년 동안 무대에 서 온 저력의 원천은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과연 그 배우들이 노배우에 대한 존경이나 예우로서가 아니라 온전한 현역 배우로서 관객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무더운 여름 주말, 인파 가득한 대학로를 찾은 이유였다.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극이 시작되자마자 찾을 수 있었다. 극장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호령하면서 일순간에 관중을 압도하는 박정자 배우에게서, 그와는 정반대로 순간순간 새침한 소녀의 모습마저 투영되는 손숙 배우에게서, 아무런 대사 없이 등장만 했는데도 그 움직임에 저절로 시선이 가는 전무송 배우에게서 말이다. 일반 직장이라면 정년을 넘고도 한참 지났을 80대 배우 3명에게서 말이다. 그들의 연기에서 나이를 논하거나 그들의 열정을 노익장으로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었다.

일반 직장에서 근로자들의 나이가 조직에 대해 갖는 의미는 어떨까. 근로자가 제공하는 노동력의 질이나 근로자의 능력 자체만으로도 정당한 평가를 받고 적절한 급여가 지급되고 있는 것일까.

1997년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일반 사업장에서 보편적인 급여체계였던 호봉제는 근속연수가 길면 길수록 근로자의 숙련도가 높아지고 조직에 대한 기여도도 커지므로 급여와 나이는 비례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그에 반해 2010년 이후 본격 도입된 임금피크제는 기본적으로 일정 연령에 도달한 이후에는 근로자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급여에 상응하는 가치를 창출할 수 없으므로 급여의 하향 조정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호봉제와 임금피크제는 나이와 생산성에 관한 상반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근로기준법상 임금이 근로의 대가로 받는 모든 금품을 의미한다고 규정돼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근로의 대가에 연령이 필수적으로 반영돼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임금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은 ‘밥값’이 아닐까. 내가 먹을 밥, 내 가족이 먹을 밥, 내가 속한 조직이 유지되고 발전되기 위해 남겨 둬야 하는 밥의 가치인 밥값을 책정할 때 ‘내가 왕년에는 말이지…’라는 과거의 서사만으로는 높은 가격을 매길 수 없다. 또 특정 연령에 도달했다는 이유만으로 어제까지 하던 밥값을 오늘부터 덜하게 될 리도 없다. 결국 근로자 임금은 나이가 아니라 근로자가 제공하는 근로의 질과 능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통해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로서 지급돼야 할 것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조직에 대한 기여도와 상관없이 과대 평가되거나 반대로 평가절하돼서도 안 될 것이다. 정년 연장이나 직무급 제도와 같은 새로운 제도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까.

연극 햄릿의 여운이 오래 남은 이유는 80대 배우들이 ‘나이에 비해’ 좋은 공연을 보여줬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극 중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면서 관객에게 울림을 주는 훌륭한 현역 배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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