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귀를 막고 가만히 누워 있다. 아무리 귀를 막았지만 내 숨소리는 들린다. 내면의 소리다. 때로는 행복의 소리로, 때로는 분노의 소리로, 때로는 무덤덤하게 바뀌지만 요즈음은 거목이 뿌리째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목은 미세한 바람일수록 심하게 흔들리지만 폭풍우가 거칠면 거칠수록 오히려 더 꿋꿋이 저항한다.
이건 전쟁이야? 한국이라는 거목은 아프리카 대륙보다, 유라시아 대륙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보다 반세기 만에 국내총생산(GDP)이 더 많은 나라가 되었다. 참으로 놀랄 일이며 참으로 장한 일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를 부러워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많은 사람은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이 우리를 넘본다고 주장한다. 그 말도 맞지만 여전히 반쪽 진리다. 그 나라의 가치는 그 나라가 이룩한 부의 척도에 따라 달라진다. 세계의 어느 곳이든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의 틈새에 있는 나라는 수도 없이 많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 스스로 만든다. 아일랜드와 핀란드 모두 영국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가혹한 탄압을 받았지만 지금 모두 영국과 러시아가 그들을 부러워한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자기보다 잘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그렇다. 이웃 중국에는 부러움을, 바다 건너 일본에는 시기를 받고 있다. 이건 전쟁이야? 국가 정체성의 전쟁이며, 역사 방향의 전쟁이며, 진실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설득의 전쟁이며, 상식의 전쟁터가 되어야 한다.
첫째는 ‘자유’의 전쟁이다. 우리나라는 작고 강한 나라다. 그렇게 된 이유는 자유와 시장경제, 민주주의 때문이다. 자유가 먼저고 그다음이 민주주의다. 자유가 없는 민주주의는 독재 국가로 전락한다. 지난 정부의 지나친 ‘시장’ 간섭으로 시장의 역습이 몰려왔다. 경제의 역동성은 사라지고 경쟁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북한으로 쏠림은 나라의 당당함을 잃었고, 중국으로 향하는 마음은 앞날을 불투명하게 만들었으며, 일본의 배척은 위기를 가져오게 했다. 일부 사람들이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의 전력이 압도적이지 않을 때 전쟁은 일어난다. 세계 유일 패권 국가는 미국이다. 아직은 한·미 동맹이 필요하다. 언제가 중국이 패권국에 이르고 국제질서를 이끌 소양을 갖추었을 그때 중국과 안보를 협력해도 늦지 않다. 우리는 일본을 활용(협력)해야 한다. 일본과 우리는 강점이 서로 다르다. 일본은 기초에 강하고, 우리는 창끝에 강하다. 창끝, 무역 정보를 가진 나라가 부국이 된다. 그 옛날 작은 나라가 이 전략으로 모두 강대국이 되었다.
둘째는 ‘관용’의 전쟁이다. 모두에게 관용의 나라가 될 때 작고 강한 나라가 된다. 나한테는 한없이 너그럽고 상대방에는 잔혹하다면 관용의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자기들의 권력 쟁취를 위해 말 같지 않은 정쟁을 하고 있다. 과거 많은 사람이 ‘적폐’라는 이름으로 수모와 고통을 당했다. 적보다 더 잔혹하게 다룬 철저한 무관용이었다. 그때 이미 설득의 전쟁, 상식의 전쟁터가 되었다. 혁신은 내 오른팔을 자르는 일이다. 오른팔을 잘라야 진정성을 얻을 수 있고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다. 나한테 너그러운 혁신은 혁신이 아니라 권력 유지를 위한 정쟁으로 전락한다. 나라의 관용은 자유도(df: n-1)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자유도 많은 나라가 관용의 나라가 되며, 관용도 높은 나라가 자유도 높은 나라이다. 작고 강한 나라가 되려면 ‘관용’이 필수다. 자기한테만 한없이 너그러운 나라는 반쪽의 나라다. 반쪽의 인재만 바라보면서 사람이 없다 하고, 반쪽만을 바라보면서 나랏일을 하면 분열을 일으킨다.
셋째는 ‘진실’의 전쟁이다. 사실과 진실에 기초한 상식의 사회가 아니라 가짜와 거짓, 유사한 사실이 쏟아지면 진실은 저만치 달아난다. 진실이 달아난 그 자리에는 ‘선동’이 차지하며, 목소리 큰 사람, 더 격한 주장이 으뜸이 된다. 그들의 주장이 ‘집단지성’으로 둔갑하고 ‘민심’이라는 민주주의로 포장될 때 그 결과는 잔혹해지고 무관용이 된다.
우리나라는 민족 역량이 내부의 갈등으로 향할 때는 모두 붕괴의 길을 걸었다. 갈등은 분열과 동시에 미래의 에너지원이다. 무엇을 갖고 갈등하느냐에 따라 파국의 분열이 될 수 있고, 부국강병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그 무엇은 ‘과거’의 문제냐 ‘미래’의 문제냐의 다툼이다. 우리는 지금의 바로 닥친 ‘용산’과 ‘여의도’의 문제도 인과관계의 복잡으로 다툼을 벌이는데, 어떻게 지난 과거의 문제에 모두를 걸어야 하는가? 우리 민족의 DNA는 역동성이다. 그 역동성이 미래를 향할 때는 ‘한강의 기적’이 다시 도래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구한말처럼 굴욕의 시대가 다시 온다.
김홍유 경희대 교수(방위산업협회 정책위원, 전 한국취업진로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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