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본으로 부실기업 M&A…모래성처럼 무너진 '큐텐 왕국'

입력 2024-07-31 17:50   수정 2024-08-08 19:48

마켓인사이트 7월 29일 오후 12시 20분

구영배 큐텐그룹 대표가 쌓아올린 ‘큐텐 왕국’이 무너지고 있다. 정산 지연 사태가 터진 지 10일 만에 기업회생 절차에 들어갔다. 사실상 무자본 인수합병(M&A) 전략으로 덩치를 키우는 데 성공했지만 예상치 못한 C커머스(중국 e커머스)의 공습과 기업공개(IPO) 계획 지연으로 돈줄이 마르자 모래성은 금방 허물어졌다. 구 대표의 무자본 M&A 계획에 동조해 주주와 채권자로 합류한 사모펀드(PEF) 운용사도 ‘초비상’이 걸렸다.
○부실 e커머스 기업 이삭 줍듯 사들여

큐텐은 2010년 구 대표가 싱가포르에서 창업한 회사다. 인도네시아 등을 중심으로 사업을 확장해 ‘동남아시아의 아마존’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국내에선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 구 대표가 G마켓을 매각하면서 약속한 경업금지 때문에 한국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도 없었다.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22년 티몬을 깜짝 인수하면서다. 당시 티몬은 쿠팡과 네이버쇼핑 등에 밀려 M&A 시장에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기업이었다. 큐텐은 티몬을 시작으로 인터파크커머스와 위메프 등 시장에서 소외된 1세대 e커머스 기업을 이삭 줍듯이 사들였다.

공격적인 인수 배경에는 큐텐그룹 물류 계열사인 큐익스프레스가 있다. 티몬과 위메프 등이 적자기업이어도 거래는 꾸준히 발생하기 때문에 이 일감을 큐익스프레스에 몰아주고 몸값을 부풀려 미국 나스닥시장에 상장한다는 게 구 대표의 계획이었다.

부실기업을 사들이는 데 자금이 크게 들어가지도 않았다. 큐익스프레스 지분을 내주고, e커머스 기업 지분을 받는 지분 교환 구조를 짰기 때문이다. 큐익스프레스와 인수 대상 기업이 비상장사인 탓에 정확한 인수 구조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2022년 티몬을 인수할 땐 현금을 한 푼도 들이지 않았다. 인터파크커머스와 위메프를 인수할 때도 일부 현금과 함께 큐익스프레스 지분을 내주는 방식을 썼다.

업계에선 티몬과 위메프 등의 투자자도 간절히 지분 매각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상의 무자본 M&A가 가능했다고 본다. 글로벌 PEF 운용사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와 앵커에쿼티파트너스는 2015년부터 티몬 주주가 됐다. 국내 e커머스 시장에서 티몬이 경쟁력을 잃으며 매각에 난항을 겪었고 일각에선 티몬의 기업가치가 ‘제로(0)’에 가깝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위메프 지분을 들고 있던 IMM인베스트먼트의 상황도 비슷했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지분을 처분하는 게 가장 큰 목표였던 PEF들은 사실상 가치가 제로인 골칫거리 기업의 지분을 내주고, 나스닥 상장을 준비하는 큐익스프레스 지분을 받는 만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C커머스 공습 직격탄
구 대표의 청사진은 그럴듯했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등장하면서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큐텐 왕국의 정점이 될 11번가 인수 시도가 무산된 게 첫 위기다. 구 대표는 인터파크와 위메프에 이어 11번가까지 품으면 단숨에 쿠팡과 네이버쇼핑에 이어 국내 3위에 오를 것으로 생각했다. 인수 계획은 성사 직전 틀어졌다. SK는 구 대표가 제안한 지분 교환 구조에 동의하지 않았다. 검증되지 않은 기업인 큐익스프레스의 지분을 받고 11번가를 내줄 이유가 없었다.

구 대표는 11번가 대신 올초 미국 e커머스 플랫폼 위시를 인수했지만 이때는 지분 교환이 아니라 약 2300억원의 현금을 투입했다. 업계에선 적자 일색인 큐텐그룹이 2000억원 넘는 인수 대금을 부담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봤다. 구 대표는 인터파크커머스 잔여 인수 대금 약 1600억원도 야놀자에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궁지에 몰린 구 대표에게 가장 큰 타격이 된 건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 등 C커머스의 공습이다. 티몬과 위메프 등이 설 자리는 더욱 축소됐다. C커머스는 국내뿐 아니라 구 대표의 주요 활동 무대인 동남아에서도 사업을 확장하며 큐텐그룹의 목을 조여왔다. C커머스가 저렴한 중국 제품을 국경을 넘나들며 판매하자 큐텐그룹의 해외직구 서비스도 타격을 입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C커머스의 전방위적 공습은 큐텐 사태를 촉발한 숨은 방아쇠”라고 했다.
○금융권 대출까지 막히자 법정관리 신청
구 대표는 올초 현금이 꼬이기 시작하자 자신의 큐텐그룹 지분을 담보로 금융권에 대출을 타진했다. 하지만 주식담보대출 작업이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회사는 회생 절차에 들어갔다. 일각에선 큐텐이 핵심 계열사인 큐익스프레스로 부실이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티메프를 ‘꼬리 자르기’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큐텐은 큐익스프레스의 나스닥 상장을 추진 중이다. 한때 희망 몸값이 10억달러(약 1조3860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유동성 위기가 큐텐그룹 전반으로 퍼져나간 만큼 더 이상 상장 목표 시점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티메프 채권단과 주주들은 각각 회생계획안을 제출하고 투표를 통해 보완하는 과정을 거칠 예정이다. 최종적인 자구안 합의에 도달하기까지 6개월가량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티메프의 채권자로는 PSA와 영국계 자산운용사 ICG, IMM인베스트먼트 등이 있다. 채권단 동의를 끌어내지 못하거나 법원이 티메프를 계속기업으로서의 가치보다 청산 가치가 더 높다고 판단하면 파산하는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 파산 절차를 밟으면 채권단과 주주가 손에 쥐는 현금이 거의 없을 수 있다.

회생법원과 채권단이 구 대표를 축출하고 티메프 회생 작업을 주도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큐텐이 보유한 티메프 지분을 전량 감자한 뒤 채권자들이 보유한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출자전환)할 가능성이 높다. 그 뒤 채권단과 회생법원이 신규 투자 유치나 매각 작업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경우 티메프 매각과 함께 큐텐 주주로 합류한 앵커에쿼티파트너스와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 등은 손실이 확정된다.

하지은/박종관 기자 hazz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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