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저 덴마크어로 ‘내 이름을 기억해 주세요’라고 부른다. 베일에 싸인 작가 허스크밋나븐이다. 주로 코펜하겐에서 활동하는 허스크밋나븐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 ‘빅 픽쳐’를 위해서다.
후드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는 158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회화는 물론 3차원(3D) 드로잉과 미디어아트도 있다. 일부 작품은 그라피티 예술가의 기질을 발휘해 미술관에 그렸다. 그는 일상의 장면들로 즐거움뿐만 아니라 인권, 전쟁, 질병 등의 묵직한 사회 문제까지 부각한다.
전시장 입구에 붉은색으로 그려놓은 벽화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작품이다. 허스크밋나븐은 미술관 벽에 일반 연필로 밑그림을 그린 뒤 그 위에 색을 입힌다. 프로젝터 등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모든 작업을 눈과 손, 그리고 감각으로만 진행한다.
벽화 작품 중 단연 돋보이는 건 ‘프레임 아트’. 벽화와 일반 회화가 만나 하나의 작품이 된다. 회화를 감싼 액자까지 모두 작품의 일부다. 모나리자가 떠오르는 흑백 액자 작업과 벽화를 함께 배치해 마치 벽 속 인물들이 모나리자 그림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작업도 소개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벽화마다 색을 달리하는 등 다채로운 모습을 강조했다. 작품마다 리듬이 모두 다르다. 한쪽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그대로 재현한 공간도 마련했다. 그라피티 작가들은 글씨를 많이 사용하지만 허스크밋나븐은 사람, 동물 등의 캐릭터를 주로 그린다. “캐릭터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지요. 언어의 벽 없이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그의 작업 과정엔 계획이 없다. 마치 알파벳을 조합하듯 눈, 코, 입을 하나씩 그린 뒤 합친다. 그 속에서 모든 캐릭터가 즉흥적으로 창조된다. 미술관에 이번 전시를 위해 남긴 벽화도 모두 이런 방식으로 그렸다. 그는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을 때 별다른 계획 없이 스케치 정도만 갖고 있었다. 그 스케치를 미술관에 들여와 공간에 맞게 배치했다. 새로운 미술관을 마주하고 즉흥적으로 활용하는 작업은 그에게 즐거움이다.
이번 전시는 오직 이곳 사비나미술관만에서만 볼 수 있다. 전시가 끝나면 벽화가 모두 사라진다. 현장성, 즉흥성이 두드러지는 전시다. 허스크밋나븐은 “벽화나 오브제 작품은 전시가 끝나면 사라지기 때문에 오직 지금, 이곳에서만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단 한 번의 전시 이후 사라지는 데 대해 상실감은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게 세상 모든 존재란 어차피 곧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덮어씌워지고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그라피티 작가로서의 경험이 만든 신념이다. 그에겐 자기 작품 위에 다시 페인트가 덮이는 것이 꽃이 지고 비가 땅에 스며드는 것과 같은 이치로 여겨진다.
이번 전시는 한국과 덴마크 수교 65주년을 기념해 이뤄졌다. 지금까지 한국 미술계에서 잘 소개되지 않았던 덴마크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덴마크 정부는 전시 예산의 80%를 지원했다. 전시는 오는 10월 27일까지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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