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찾은 영국 런던 킹스크로스 일대에는 초고층 빌딩을 옆으로 뉘어놓은 모습의 건물 공사가 한창이었다. ‘랜드 스크레이퍼’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 구글의 런던 사옥이자 유럽 헤드쿼터다. 건물 길이만 300m에 달하는 규모(연면적 9만3000㎡)로, 기존 구글 런던 사무실 면적의 8배에 달한다.
1조4000억원이 투입된 이 사옥은 구글이 미국 외 지역에서 자체 소유한 유일한 건물이다. 킹스크로스의 인허가를 담당한 피터 비숍 런던대 바틀릿건축스쿨 도시디자인학과 교수는 “부지 면적의 절반에 쾌적한 공공 공간을 조성하고 세계적인 예술대를 유치하는 데 공을 들였다”며 “구글 같은 세계적 기업이 들어오면서 킹스크로스의 자체 경쟁력도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 해리포터 촬영지로 유명한 킹스크로스는 도시개발사업의 모범이자 ‘직·주·락’(직업·주거·여가)이 가장 잘 구현된 개발 사례로 꼽힌다. 퇴근 무렵 찾은 킹스크로스는 이런 평가를 방증하듯 각양각색의 사람으로 북적였다. 업무를 마치고 바삐 움직이는 IT 기업 직원, 그래너리스퀘어와 콜드롭스야드 쇼핑몰에서 여가를 즐기는 주민과 관광객, 수업을 마치고 맥주 한잔을 즐기는 유럽 최대 종합예술대(런던예술대) 학생이 골목과 상점을 채웠다.
킹스크로스는 대지 27만㎡에 25년에 걸쳐 진행되는 유럽 최대 역세권 개발 사업이다. 6개 지하철 노선과 런던 교외를 이어주는 기차, 프랑스 파리·벨기에 브뤼셀·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 유럽 대륙과 연결하는 유로스타가 출발하는 교통 허브다. 이 지역엔 2013년 구글의 신사옥 발표를 시작으로 삼성전자와 메타 같은 글로벌 IT 기업, 럭셔리 패션 브랜드 루이비통, 세계 3대 레코드 회사 유니버설뮤직 등 다양한 업종의 기업이 속속 자리를 잡았다.
킹스크로스 개발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복합공간을 이상적으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10개 공원을 비롯해 광장 녹지 도로 등 공공 공간 비중이 40%에 달한다. 건물은 56%가 오피스이고 나머지는 주거(24%) 리테일(11%) 문화·교육·레저·호텔(9%) 등으로 채웠다.
2011년 이전을 결정한 런던예술대의 예술·디자인·패션 부문 칼리지 센트럴세인트마틴스(CSM) 역시 킹스크로스의 매력을 한 단계 끌어올린 ‘신의 한 수’라는 평가가 나온다. 구자훈 한양대 도시대학원 교수는 “런던예술대 CSM 이전으로 킹스크로스에 창의적 인재가 몰리고 IT 기업들이 둥지를 틀었다”고 평가했다.
제조·물류 중심지였던 킹스크로스역 일대는 관련 산업이 쇠퇴하면서 1970년대 마약과 매춘, 범죄가 난무하는 낙후 지역으로 전락했다. 당시 전문가들은 주민과 상인도 외면한 지역에 대규모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킹스크로스 개발이 막대한 시간과 자금 부담 리스크를 극복한 데는 공공과 민간의 절묘한 협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개발을 관할한 캠던자치구는 민간 시행사 아젠트가 주도적으로 마스터플랜을 짜도록 하면서 용도지역과 바닥면적 등을 정하는 데 20%에 달하는 파격적인 ‘유연성’을 허용했다. 영국 최대 도시연구기관인 센터포시티스의 앤서니 브리치 부소장은 “초기에 모든 것을 확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공간 수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개발 위험이 줄자 아젠트는 땅의 가치를 높이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개발 첫 단계에서 상업용 부동산 대신 11개의 공공 문화공간 등으로 구성된 그래너리스퀘어부터 지은 게 대표적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여가·주거·상업·교육시설 등을 복합적으로 구현해내자 글로벌 기업이 먼저 러브콜을 보냈다.
킹스크로스 마스터플랜을 담당한 알리스앤드모리슨의 밥 알리스 공동창업자는 “2008년 리먼 사태로 사업이 위기를 맞았을 당시 아젠트는 CSM을 유치하기 위해 그 학교의 건물 매각에 팔을 걷어붙였다”며 “좋은 계획을 세운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장기적으로 잘 구현되도록 해 훨씬 더 큰 수익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런던=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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