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PEF 투자를 '선의'로 착각한 대가

입력 2024-08-04 17:42   수정 2024-08-05 00:24

사모펀드(PEF·경영참여형 사모집합투자기구)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태동한 것은 1960년대 중반이다. 기업 경영권을 사들인 뒤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거쳐 몸값을 높인 후 되파는 바이아웃 기법이 뿌리내렸다. 수익률을 올리기 위해선 차익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련의 과정을 얼마나 빨리해내느냐가 관건이었다. 임직원과 소액주주, 소비자 등 기업의 이해당사자들은 외면당하기 일쑤였고 기업의 장기 성장성도 평가절하됐다.

20년쯤 지난 1980년대 중반이 되자 단기차익 극대화에 대한 탐욕은 ‘광기’로 변했다. 1988년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의 RJR내비스코 인수 건이 그랬다. KKR은 차입매수(LBO) 방식으로 RJR내비스코를 헐값에 사들인 뒤 기업을 잘게 잘라서 팔아 막대한 차익을 거뒀다. 이 사건을 다룬 책 <문 앞의 야만인들>은 PEF를 기업 생태계를 파괴하는 야만인으로 묘사한다.
PEF의 이상한 대박 사례들
한국도 PEF가 처음 도입된 지 올해로 20년이 됐다. 어느덧 운용사가 1000곳에 달하고 전체 자산 규모는 150조원에 육박한다. 그동안 PEF의 성과는 눈부시다. 기업들의 성장을 위한 젖줄이 됐고, 구원투수 역할도 했다. 버거킹, 아웃백 등 죽어가는 기업을 되살린 사례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광기 어린 ‘성인식’을 치른 미국처럼 스무 살을 맞은 한국 PEF에도 우려스러운 부작용이 발현되고 있다. 요즘 PEF의 대박 사례를 보면 그렇다. 투자한 기업이 잘나가서 덩달아 수익을 내는 게 아니라 기업이 어려울수록 돈을 버는 이상한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그것도 시장의 예상 수준을 훨씬 웃도는 이른바 ‘약탈적 수익’을 얻고 있다. 기업에 투자할 때 걸어놓은 각종 옵션과 계약 때문이다.

SK그룹은 최근 SK온을 살리기 위해 SK이노베이션과 SK E&S 합병을 추진하면서 KKR과의 계약 때문에 골치를 썩어야 했다. SK그룹은 KKR에 SK E&S 상환전환우선주(RCPS)를 내주고 3조원을 투자받아놓은 상태였다. 두 계열사를 합병하려면 KKR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결국 RCPS의 보장수익률을 연 7.5%에서 9.9%로 올려주고 1000억원 규모의 배당수익도 얹어주기로 했다.
기업 성장을 가로막는 덫
태영그룹 지주회사인 TY홀딩스도 KKR로부터 4000억원을 빌렸다가 적지 않은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이자도 막대했지만, 거기에 더해 알짜 자회사인 에코비트까지 팔아야 할 처지가 됐다. ‘TY홀딩스가 어려워지면 에코비트 지분을 KKR에 뺏길 수 있다’는 계약 조항 때문에 신경전을 벌이다가 아예 매각을 택한 것이다.

신세계그룹은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 등으로부터 1조원을 투자받았다가 ‘SSG닷컴이 어려워지면 원리금을 상환한다’는 약정 때문에 이 지분을 되사줘야 할 처지가 됐다.

회사 입장에서는 유명 PEF가 거액을 들고 와 좋은 가격에 투자하겠다고 하니 혹해서 벌어진 일들이다. ‘경영이 어려워지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막연한 낙관과 PEF가 ‘선의의 동반자’라는 순진한 인식으로 옵션을 걸어놨는데 요즘 2차전지, 유통 등 국내 주요 산업이 어려워지자 그 옵션이 곳곳에서 사업 재편과 성장을 가로막는 ‘덫’으로 돌변했다. PEF의 투자금을 ‘공짜 점심’쯤으로 착각한 대가를 지금 기업들이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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