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파리올림픽에서 대한민국에 양궁(금5·은1·동1) 다음으로 많은 메달(금3·은2)을 안긴 사격은 현재 종목을 후원하는 대기업이 없다. 하지만 대한양궁협회장을 맡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스포트라이트 받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못지않은 ‘키다리 아저씨’가 사격에도 있었다.
20년 넘게 비인기 종목인 사격을 지원하며 발전기금만 200억원 넘게 내놓은 한화그룹이 숨은 주인공. 사격 마니아로 알려진 김승연 회장과 한화그룹은 2001년 한화갤러리아 사격단을 창단했고 이듬해인 2002년 대한사격연맹 회장사를 맡았다. 2008년부터는 국내 주요 대회 중 하나인 한화회장배 전국사격대회를 매년 개최하는 등 사격 저변을 넓히는 데 힘썼다.
한화가 회장사를 맡은 후 첫 올림픽인 2004 아테네올림픽에서 진종오가 자신의 첫 메달(남자 50m 권총 은)을 목에 걸면서 ‘사격 황제’ 전설이 시작됐다.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양궁 김우진이 기록을 깨기 전까지 진종오는 한국 선수 최다인 올림픽 금메달 4개를 따냈다. 한국 사격은 2012 런던올림픽에선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의 사상 최고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한화와 사격연맹이 국제 사격 경기 규정에 맞춰 전자 표적으로 경기를 진행하는가 하면 겨울에는 선수단이 따뜻한 기후에서 전지훈련을 하는 등 아낌없이 지원한 결실을 맺은 셈이었다.
2017년 갤러리아 사격단 해체 이후 한화가 사격에서 손을 뗄 것이란 얘기가 흘러나왔지만, 한화는 항저우아시안게임까지 끝난 뒤인 지난해 11월에야 한화갤러리아 대표 출신 김은수 전 대한사격연맹 회장이 물러나며 회장사 자리에서도 내려왔다.
당시 한화그룹은 “장기간 사격계를 후원해 사격 발전에 대한 목적을 달성했다. 새로운 기업이나 개인에게 기회를 열어줘 사격이 한 단계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내려놨다”고 했고, 사격연맹도 “"이제까지 헌신한 한화그룹의 노고에 감사드린다”고 화답했다.
한동안 공석이던 사격연맹 회장직은 올해 6월 초 신명주 명주병원장이 단독 출마해 선출됐다.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위기감이 감돌기도 했으나 사격은 완벽한 세대교체와 함께 ‘효자 종목’으로 자리매김했다. 2000년대생 오예진(여자 10m 공기권총) 반효진(여자 10m 공기소총) 양지인(여자 25m 권총)이 잇따라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게다가 여자 10m 공기권총에서 은메달을 딴 김예지는 이번 올림픽 최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스타가 됐다. 시크(chic)한 매력의 사격 영상에 X(옛 트위터) 소유주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까지 댓글을 달면서 해외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비록 회장사 자리를 내려놨지만 오랜 기간 진득하게 후원해온 만큼 한화그룹 내부에서도 파리올림픽에서의 선전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다는 후문이다. 한국 사격은 이제 신기록을 정조준한다. 당장 이날 오후 4시30분(한국시간) 열리는 남자 25m 속사권총 결선에 오른 조영재가 색깔과 상관없이 메달을 따내면 런던올림픽을 넘어 역대 최고 성적을 다시 쓴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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