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여름의 빛 속에서

입력 2024-08-06 17:35   수정 2024-08-07 00:05


어느덧 입추인데, 체감온도 35도 안팎의 불볕더위는 좀처럼 꺾이지 않는다. 한낮 열기에 얼굴은 발갛게 익고 머리카락은 불타오르는 듯하다. 염천 아래서 밭일이나 폐지 수거를 하던 노인들이 온열 질병으로 쓰러졌다는 안타까운 뉴스도 간간이 전해진다. 무더위에도 동네 빵집과 우체국은 문을 열어놓고, 우체부와 소방대원들은 한가롭게 쉴 틈이 없다. 송해 선생은 떠났지만 일요일엔 여전히 전국노래자랑이 방영되고, 우리는 점심으로 콩국수를 먹으며 여름나기를 한다.
화염처럼 타오르던 에게해의 빛
여름 휴가철로 텅 빈 도시는 호러 영화에나 나올 법한 유령도시 같다. 나는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 가벼운 운동화 차림으로 동네 도서관을 찾아가 종일 책을 읽다가 돌아온다. 냉방장치 실외기의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릴 정도로 도서관은 적막하다. 나는 한자리를 꿰차고 앉아 긴 소설을 읽는데, 그 일이 끝나면 뭔가 큰일이라도 해낸 듯 보람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도서관을 나서며 내일도 와서 오늘 다 읽지 못한 두꺼운 책을 마저 읽으리라고 마음먹는다.

그해 여름 한 방송사의 촬영 팀과 함께 그리스와 튀르키예 여기저기에 흩어진 그리스와 로마 신화의 무대를 직접 돌아볼 참이었다. 이스탄불에서 출발해 에게해 연안 도시들과 로도스, 산토리니, 크레타섬을 거쳐 아테네에서 마침표를 찍는 일정은 빡빡했다. 크레타섬을 찾았을 때도 여름이 한창이었다. 소형 여객기가 쉰여 명의 관광객을 태운 채 헤라클리온 공항에 착륙했을 때 일대는 여름의 빛에 감싸여 있었다. 그 빛이 얼마나 눈이 부신지 눈을 뜰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손차양을 한 채 눈을 반쯤만 뜨고 섬의 먼 곳을 바라봤다.

에게해 양안의 여름은 빛으로 충만하고, 고대 유적지 그늘 아래 낮잠을 즐기던 늙은 개들은 한가로웠다. 고대 도시의 폐허와 무너진 벽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무성한 잡초 속에 묻혀 있었다. 한때 사람들로 흥청대던 고대 도시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차지한 트로이 들판에는 진홍색 개양귀비꽃과 연보라색 라벤더, 센 바람에 가지를 흔들며 거친 숨소리를 뿜던 벌판 한복판의 무화과나무가 서 있을 뿐이었다. 찌는 더위가 한창인 여름 무화과나무가 드리운 그늘은 서늘하고, 그 그늘 아래서 하얀 화염처럼 타오르던 여름의 빛을 바라보던 그때가 바로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리를 채우는 만인의 귀한 재화
크레타섬에서는 아침식사를 거르고 해안가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나는 바닷가 쪽에 자리를 잡고 빵과 신선한 채소, 오징어와 문어를 곁들인 해산물 요리를 주로 먹었는데, 그때 먹은 지중해 음식에는 올리브 열매가 늘 풍성하게 나오고 빵들은 다 맛있다. 점심을 배부르게 먹고 바닷가를 걷다가 에게해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며 빛과 그림자, 그리고 재와 밀랍에 관한 상상에 빠졌다. 나는 그 시간의 정일함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고요와 평화에 기댄 채 한가롭던 내 기분은 낙관적이었다.

나는 여름이 좋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 빛, 빛들! 여름의 빛은 마치 촉수가 달린 듯 얼굴을 간지럽히지만 목백일홍 붉은 꽃이나 수탉의 볏 같은 맨드라미꽃에서는 자글자글 끓는다. 쾌청한 오전 빨랫줄에 넌 셔츠나 수건 따위는 반나절이면 습기 한 점 없이 잘 마른다. 마른 옷에 코를 박으면 햇빛 냄새가 난다. 내 안에 도사린 한 조각 불안과 음습함마저 날려줄 것 같은 여름 햇빛 냄새를 맡으려고 나는 자꾸 방금 걷어온 마른 옷에 코를 박는다.

내가 여름에 열광하는 건 어디에나 넘치는 빛 때문이다. 빛은 여름이 가진 귀한 재화다. 이 재화는 누구도 독점할 수 없고 만인에게 골고루 분배된다. 이마를 태울 듯 작열하던 여름의 빛이여. 누리를 채우는 여름의 빛이여. 무엇보다도 여름의 빛은 살려는 의지를 북돋운다. 빛은 인간의 생존 활동을 돕는다. 빛이 없다면 인간의 활동은 제약을 받을 게 분명하다. 우리는 낮 동안 의미 있는 노동을 하며 제 삶을 일군다. 나는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모든 일이 내 뜻대로 풀리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삶이 품은 모든 난제는 실은 기출문제들이다. 익숙한 문제들이라 할지라도 그걸 푸는 건 골이 지끈거리는 일이다.
당신은 작년보다 선량해졌으니
빛은 정오에 가장 빛나고, 자연광이 사라지는 자정 무렵에 대지는 어두워진다. 빛의 배후는 언제나 어둠이다. 여름의 빛 배후엔 고라니가 튀어나오는 한밤의 국도, 노란 달과 별빛이 희미한 어두운 숲속, 밤새 파도가 철썩이는 백사장, 어둠이 집어삼킨 도시의 뒷골목이 있다. 어둠이 두텁게 대지를 찍어 누르는 밤중에 활동하는 건 주로 올빼미 같은 야행성 조류들인데, 이들은 냄새와 소리, 자기장에 기대어 먹잇감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올빼미가 어둠 속 낙엽 더미 위를 타고 지나는 들쥐 같은 설치류의 몸통을 찰나에 낚아챌 수 있는 것은 그런 능력 덕분이다.

에게해 인문학 기행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서 바람이 선선해진 저녁엔 리 오스카의 하모니카 연주곡 ‘샌프란시스코 베이’를 들으며 삶은 옥수수나 수밀도 복숭아를 먹었다. 수밀도 복숭아를 서른 개쯤 먹고 나니 여름은 저만큼 물러난다. 당신은 작년보다 더 선량해졌으니 여름의 처연함은 곧 끝나겠구나. 뇌우가 우는 저녁이 한 줄로 다가오는 날에 우리 사랑은 잡초처럼 우거졌다.

오, 그토록 넘치던 여름의 빛과 열기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귀가 먹먹하도록 울어대던 매미 소리도 잠잠해지고 아침저녁으로 찬바람 부는 가을 초입에서 우리는 불안한 듯 서성이며 가뭇없이 자취를 감춘 여름의 빛과 영광을 내내 그리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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