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세상을 나름의 스토리로 이해한다. 부모의 가르침, 학교 공부, TV에서 본 이야기 등이 더해지고 혹은 걸러지면서 생각의 가닥이 잡히고 판단의 기준이 만들어진다.
드라마나 영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수다가 뉴스만큼 중요하고 무슨 말인지 모를 거창한 논문이나 유력 인사의 주장보다 더 믿음을 얻기도 한다. 꼴 보기 싫은 사람이나 남들도 싫어하는 사람이 한 얘기는 즉시 걸러진다.
사람마다 각자의 세계에서 살고 그 세계가 맞물려 현실이 되는 셈이다.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단편적 정보가 시장에 즉각 반영되는 기존의 경제학 이론과 다른, 사람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형성한 나름의 스토리가 어우러져 시장이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이야기 경제학(narrative economics)’의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시장 분석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각종 지표나 경제통계는 스토리를 이루는 부분으로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사실 경제학 수업에서 흔히 접하는 ‘합리적 선택’은 시장 선택과 균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가정일 뿐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통찰은 아니었다.
심리학의 일부 이론, 특히 인지심리학을 빌려다 만든 마케팅 이론들도 마찬가지다. 실러의 시각은 꽉 막힌 경제학 동네에서는 나름 참신하지만 재미있고 속 시원한 얘기를 만드는 과장과 왜곡,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마음을 담지 못했다(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저승에서 들으면 역시 학자들 하는 일이라 순진하다고 비웃었을 것 같다).
잘 알든 모르든 내 맘대로 생각하는 세상, 여기에 미디어의 현실과 알고리즘까지 더해져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끼리끼리 공감하니 더욱 심란해진 시대, 경영자에게 주는 의미와 전략을 생각해 보자.
왜 돈 많은 건설업자와 금융사를 돕느냐는 질문에는 답이 궁하다. 바쁜 생활인들이 자구책, 출자전환 같은 복잡한 얘기를 애써 시간 내어 공부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각종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굳어진 건설업에 대한 고정관념이 부담스럽다.
착한 주민들 몰아내고 아파트 지어 떼돈을 벌면서 안전대책도 없이 근로자와 하청 업체를 쥐어짜는 건설사를 왜 돕느냐는 생각이다.
단편적으로 알려지는 비리나 안전사고, 주민과의 분쟁 등은 드라마와 영화의 스토리에 또 다른 증거가 되고 시청률과 조회수에 매달리는 미디어가 이런 막연한 생각에 편승하면 대중의 판단에 감정이 더해져서 더욱 단단한 스토리가 형성된다.
표에 목숨을 건 정치인으로선 지원책에 잘못 발을 담갔다간 철거민 내쫓고 땅장사 해서 돈 버는 깡패와 한통속으로 몰리는 꼴이 되니 나서기 어렵다.
관련된 회사들이 줄줄이 망하면 경제가 흔들리니 응급처방으로 틀어막지만 관계 당국도 제대로 부실을 털어낼 용기는 없다. 자칫 작은 비리라도 드러나면 모조리 대역죄인이 될지도 모르니까.
K 건설 G 회장은 이런 상황이 황당하다. 주택사업 전반의 돈줄이 막히면서 사업성이 충분하고 재무 상태도 양호한 K 건설의 프로젝트마저 진행이 안 되는데, 정책당국은 옥석을 가리지도 못하고 제대로 된 지원책도 못 펴기 때문이다.
업계에 대한 대중의 고정관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해외 건설과 토목으로 사업 기반을 잡은 K 건설에 ‘철거폭력’이나 ‘땅 투기’는 해당 사항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회장님이 보는 신문들의 특집에는 건설업계의 착한 경영이 종종 실렸고 무슨 상도 받았다. TV 뉴스에는 해외 사업장의 미담이 나온 뒤로 성과는 더 높아졌다고 여겨왔다.
불행히도 건설사를 ‘철거 깡패’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얘기는 접할 일도 없고 혹시 노출돼도 제목만 보고 거른다. 건설사와 부동산 업자의 음모로 땅값, 집값이 뛴다는 괴담은 집 걱정에 시달리는 답답한 마음에 위안이라도 되니 눈길이 간다. 철거폭력은 시행사 단계의 일이라고? 건설사마다 사정이 다르다고? 애써 공부까지 할 생각은 없다.
G 회장이나 업계 경영자들은 사실 건설사가 깡패로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는 본 적도 없다. 혹시 잘못된 언론 보도나 국회 질의라면 해명이라도 해보겠지만 회사에 도움이나 위협을 줄 힘센 사람들도 아닌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까지 챙겨볼 여유도 없다. 협회나 경영자단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불행히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전혀 다른 세계에서 나름의 생각을 만들고 있으며 소비자이자 투자자, 나아가 유권자로 세상을 움직인다. SNS와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보고 싶은 것만 돌려보는 편향된 노출로 몰아간다. 편 갈라 우겨대고 이를 동원하는 정치적 과정이 더해지면 일은 더욱 복잡하고 심란해진다.
건설업, 특히 주택사업에 대한 대중의 생각이 엉터리 가짜뉴스에서만 나왔을까? 막무가내 철거폭력, 대주주나 경영진의 땅 투기와 알박기, 이권 사업이 있었고 드라마나 영화는 이를 각색한 것이다. 세상이 달라졌는데 여전히 오해한다면 설명하고 바로잡아야 했다.
당장 급한 대로 힘센 사람 찾아가 읍소하고 ‘회장님 일가가 보시는’ 몇몇 신문과 TV 뉴스만 필사적으로 틀어막아 세상에 없던 일로 꾸미려던 행태가 이어진 결과라면 지금 그 대가를 치르는 셈이다(나중에 알려지면 비밀스러운 얘기가 돼 스토리의 힘을 더한다. 과장과 왜곡이 오히려 장엄함을 더하니 바로잡기도 어렵다).
시시각각 변하고 사람마다 다른데 댓글 한 줄, SNS 글 하나까지 대응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해와 공감이 형성되는 스토리텔링의 맥을 짚어야 한다. 건설 PF에 대한 시선에는 기업부채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포함된다. 무차입 경영은 사실 기업의 잠재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아직도 ‘탄탄하고 건강한’ 경영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대기업 중심의 압축성장 전략에서 은행 돈을 몰아주니 그들의 부채를 ‘부실하고 독점적인 경영’의 상징으로 이해한 결과다. 이런 생각은 ‘돈 부족해서 신세 지는’ 일상의 체험과 일치한다. 따라서 부채에 대한 불신은 사업의 건강성에 대한 믿음으로 풀어야 한다.
사람들은 새롭게 얻은 사실과 의견을 접하면서 생각을 수정해간다. 일종의 가설 검정인데, 스토리텔링의 구조를 이해하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보면 좋을지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시할 수 있다. 쉽고 재미있게, 교묘하게 속을지 모른다는 부담이 없도록 가려서 알려주고 판단을 돕는다면 무턱대고 가르치려 드는 꼰대 짓보다 100배는 효과적일 수 있다.
지혜로운 자는 생각해서 배우고 미련한 자는 매로 배운다지만 제대로 깨우쳐 가닥을 잡지 못하면 매를 맞고도 계속 헤맨다. 그 고통은 밑천 짧은 사람들의 몫이다. 진정 만인의 행복을 위해 일한다면 뭐라도 안다고 들이대기 전에 먼저 사람들의 생각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진화하는지 살펴볼 일이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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