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제7권 ‘양규’ 장군 편엔 “칼을 뽑으면 1만 명의 적들이 다퉈 달아났고, 강궁(强弓)을 당기면 적들의 군대는 항복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역사학자들이 그를 40만 대군에 맞서 단 3000명의 병력과 절박함으로 성을 지킨 용장(勇將)으로 평가하는 이유다.
우주 패권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고려거란전쟁 못지않다. 미국은 민간 주도의 ‘뉴 스페이스’ 시대를 열었고, 일본은 대기업과의 협력을 앞세워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밀착하고 있다. 미국을 넘어 2045년 우주 최강국에 오르겠다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우주 굴기’는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유엔우주업무사무소(UNOOSA) 기준으로 우주 전담 기관을 운영 중인 국가는 74개국에 이른다. 우주항공청 개청 3개월 전까지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주요 20개국(G20) 중 우주 전담 기구가 없는 국가는 한국뿐이었다. 지난 5월 문을 연 우주항공청은 치열하게 따라가도 쉽지 않은 지각생이다. 하지만 조직 그 어느 곳에서도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영문 홈페이지는 ‘Service is being prepared(서비스 준비 중)’라는 문구가 떠 있고, 포토뉴스엔 청사 사진만 가득하다.
인력 채용 상황도 심각하다. 우주항공임무본부 산하 핵심 4대 보직 중 수송(발사체)·탐사·항공 부문장이 아직도 공석이다. 실무를 책임질 과장급 보직 인선도 속도가 더디다. 우주청 우주항공임무본부 산하에는 분야별로 임무설계프로그램장과 임무보증프로그램장이라는 과장급 보직이 있다. 우주청에 전화해 해당 보직의 역할에 관해 물었지만 실무를 담당하는 관련 부서 그 누구도 명확하게 답변하지 못했다. 개인 용무 때문에 답변할 수 없다는 황당한 직원도 있었다.
이들을 이끄는 윤영빈 청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서울대 교수 시절부터 학생 배려를 잘하는 덕장(德將) 리더십으로 유명했다. 이런 성향은 임기 초 정부나 외부 기관과 소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계속 부드럽기만 해서는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우주청은 출발이 늦은 만큼 절박함으로 선진국을 좇아야 한다. 양규와 같은 용장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병사들이 필요하다. 개청 100일도 되지 않았다는 항변도 이제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부 부처의 혁신적인 롤모델을 제시하겠다는 우주청의 목표가 수사에 그치지 않으려면 리더가 변해야 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리더는 덕장보다 용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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