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돌풍’ 12화를 완주하는 동안 머릿속에 저장해둔 대사만 해도 수십 개가 넘는다. 요즘도 나는 ‘박동호’와 ‘정수진’의 대사를 수시로 활용한다. 입안에 장전하고 있다가 틈만 나면 발사하는 식이다. 누군가가 실없이 웃는 순간을 보면 놓치지 않고 말한다. “웃어. 곧 울게 될 테니까.”
왜 이제야 깨달았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는 누군가를 보면 이때다 싶어 끼어든다. “진실은 이게 문제야. 너무 늦게 드러나거든.”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돌풍증후군’이라고 놀려대지만 내가 안 보는 곳에서 그들도 나처럼 이 대사 저 대사 써먹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잘 쓴 대사는 홀씨 같은 것이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개체를 증식한다.
‘돌풍’의 대사에는 권모술수가 있는가 하면 처세와 치세가 있다. <삼국지>와 <수호지> <초한지>가 있는가 하면 <손자병법>이 있다. <오디세이아>가 있고 <성경>이 있으며 <대부>가 있다. 그리고 그 모든 말을 삶의 현장으로 옮겨놓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있다. 알 것 같은 얘기, 알 것 같은 분노, 알 것 같은 혐오, 알 것 같은 것들의 핵심에 여의도가 있다.
여의도 정치 문화를 소재로 인간의 변질과 몰락을 그리는 ‘돌풍’은 시대를 관통하는 고전적 품위와 동시대를 빼다 박은 클리셰가 절묘한 밸런스를 이루는 가운데 명장면과 명대사를 속출시킨다.
그러나 명대사가 발에 차일 만큼 쏟아진다고 해서 이 드라마의 대본집을 출간한 건 아니다. 제아무리 좋은 대사도 결국에는 인물의 성격에 복무하는 부분일 뿐이다. 결정적 대사란 결정적 인물을 드러내는 방식일 뿐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인물의 성격과 인물의 운명이다. ‘돌풍’의 대사가 치명적인 건 그들이 내뱉는 말이 정의의 외피를 쓴 타락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개혁이란 옷을 입은 부패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돌풍’은 인간의 상태가 어떻게 변질되는지, 그 변질을 촉진하는 공기가 무엇인지를 권력자와 대중이란 관계의 함수를 통해 검증한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부패의 성격과 그러한 부패를 관장하는 공기의 리얼리티가 ‘돌풍’에는 있다.
그러니 박경수 대본집 <돌풍>에는 대본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하나도 없다. 배우의 포토카드는 물론이고 그 흔한 스틸컷조차 없다. 오직 글이 있을 뿐이다. 이 글은 시대의 한계에서 태어났고 박경수라는 한 작가의 성찰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이제는 시청자와 독자의 감상과 평가를 통해 제 역할을 하려 한다. 그 역할이 세상의 성찰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잘 쓴 글이야말로 홀씨 같은 것이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문화라는 땅에 새 뿌리를 내린다.
박혜진 문학평론가·민음사 한국문학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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